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국경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파헤치다 격돌하는 남북한 비밀 요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첩보 액션 스릴러 영화다. 극 중 박정민은 북한 국가보위성 조장 박건으로 등장해 조인성이 맡은 국정원 소속 조 과장과 대립한다.
조 과장과 함께 첩보 액션 스릴러로서의 장르적 긴장감을 끌고 가는 축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전 연인인 채선화(신세경 분)의 앞에서는 흔들리는 감정을 미처 추스르지 못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인물이다. 조국과 이념, 임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이 인물을 그려낸 박정민은 수많은 신 가운데 단 한 장면을 ‘박건의 멜로’라고 짚었다.
“제가 대부분의 신에서는 멜로라고 생각하지 않고 연기했지만, ‘이 신은 멜로다’라는 느낌이 들었던 신이 식당 뒤에서 선화를 만나는 장면이었어요. 선화와 건이 단둘이 이야기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인데 대본으로만 봤을 땐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상이 잘 안 되더라고요. 촬영 날도 모든 사람들이 정말 촉각을 곤두세울 정도였죠(웃음). 제가 고민을 많이 한 걸 아셨던 감독님이 그날 (조)인성이 형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형도 현장에 계셨는데, 촬영을 마치고 형이 제게 귓속말로 ‘좋아좋아!’ 그러시더라고요(웃음).”

“그 신은 ‘그래서 이 둘이 어떻게 된 건데? 무슨 사이인데?’ 이런 궁금증을 줘야 했어요. 감정이 계속 튀어나와야 하지만 그게 직접적이어서는 안 되는, 그런 게 좀 어렵고 잘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대사 연습을 제일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했던 신이 그 신이에요. 리허설 때 첫 대사가 ‘잘 지냈소’였는데 감정 없이 편하게 내뱉으니까 오히려 좀 더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어렵사리 오랜만에 만나서 ‘잘 지냈냐’고 묻는다는 게 가슴을 때리는 게 있어서, 고민 끝에 이 감정을 가지고 가보자고 생각했죠.”
‘휴민트’는 장르적 특성상 박정민과 조인성이라는 남성 배우 ‘투 톱’을 내세운 작품이지만 박정민이 현장에서 뚜렷하게 체감한 것은 신세경의 존재감이었다고 했다. 신세경이라는 거대한 산 같은 배우가 극을 좌지우지한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박정민은 그에게서 강렬하면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아 비로소 박건이란 인물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사실 관객 분들 입장으로서는 ‘(러브 라인이) 조인성-신세경일 줄 알았는데 웬 박정민-신세경?’ 하실 수 있지만, 내용을 알고 있는 제 입장에서 촬영하면서 느낀 건 ‘이건 조인성과 박정민의 영화가 아니라 신세경이라는 너무나도 거대한 존재감이 뚝하고 떨어진 영화’라는 거였어요. 신세경이 연기한 채선화란 인물이 판을 흔들고 있다는 느낌을 정말 많이 받았거든요. 그 덕에 저도 선화라는 인물에 더 집중해서 박건을 연기할 수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준 세경 씨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죠(웃음).”

이런 설정은 배우의 연기 영역 밖에서도 작용했다. 조명과 프레임의 미묘한 조절과 조화가 ‘휴민트’ 속 박정민의 다소 거칠고 날 선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를 통해 이전에는 본 적 없었던 감정선을 박건 안에 고스란히 쏟아낸 박정민을 향해 호평이 쏟아진 가운데 정작 본인은 “시키는 대로 했다”며 류승완 감독에게 공을 돌렸다.
“류승완 감독님이 제게 답답해 하셨던 게, 조명을 못 찾아먹고 너무 자유롭게 한다는 거였어요. 사실 ‘밀수’까지만 해도 조명을 크게 신경 쓰는 역이 아니라 괜찮았는데 박건은 정말로 ‘찾아먹어야’ 하는 인물이라 그걸 유념하면서 연기해야 했거든요(웃음). 또 마지막 장면 같은 경우에는 감독님이 ‘선화를 계속 바라봐 줘’라는 지시를 주셨어요. 어떻게 바라봐야 좋을지 깊이 고민하다 감독님과 상의한 결과는 ‘내가 한 번 실수하고 잘못을 저질렀지만, 현재도 사랑하는 내 연인을 마지막까지 눈에 담고 싶어 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자는 거였죠. 그래서 지시대로 그렇게 해보려고 했습니다(웃음).”
박정민의 정통 멜로, 로맨스 작품을 바라는 대중들의 기대감은 ‘휴민트’에서 또 한 번 정점을 찍을 것으로 보인다. 장르와 무대를 가리지 않고 활약해 온 그가 차기작으로 이런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작품을 가져올 것인 지에도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다만, 당분간은 그를 자주 보진 못하게 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해 계획했던 ‘잠시 휴식’을 올해에야 겨우 달성할 수 있게 돼서다. 그래도 멜로에 대한 도전 의지를 확실히 밝힌 만큼 멀지 않은 때에 ‘박정민의 정통 멜로’를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좋은 멜로 작품이 있다면 안 할 이유가 없죠. 그 절절함에 깊이 공감하며 ‘내가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당연히 할 거예요. 멜로라고 해서 ‘으, 안 해!’ 이런 건 예전에도 전혀 아니었거든요. 다만, 아마 내년부터는 저를 한참 못 보실 가능성이 있어요(웃음). 제가 지난해 쉴 예정이라는 말씀을 드렸었는데 그 와중에도 일을 열심히 하는 바람에 계속 어딘가에서 나오고 그랬거든요. 그 업보가 올해 닥쳐서 이 영화를 끝으로는 이제 나올 게 없습니다(웃음). 대신 출판을 열심히 할 거예요. 출판사 무제는 현재 순항 중이고요, 앞으로는 좀 더 문학 작품에 집중도가 있는 출판사라는 뚜렷한 색깔도 가져 보려고 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