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황 씨의 집은 경기도 고양군(현 고양시)이었다. 아버지는 가출한 어머니를 찾기 위해 집을 비웠지만 형과 여동생이 있었다. 삼남매는 공병을 주워다 팔거나 미군 부대의 헌병이 주는 급식 쿠폰 등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하루는 형이 대전에 사는 작은 아버지 댁에 다녀오라고 했다. 사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생했다.
“대전에서 완행열차를 탔는데 서울역이 아니라 용산역에 도착했어요. 내려보니 깜깜한 밤이에요. 갈 데가 없어서 용산역 앞에 서 있는데 젊은 청년 두 명이 와서 ‘배고프냐’고 묻더라고요. ‘그렇다’고 했더니 라면을 하나 사줬습니다. 그러고선 저를 용산파출소로 데려갔어요. 경찰이 무섭잖아요. 시키는 대로 앉아 있었어요. 새벽이 되니까 ‘닭장차’처럼 생긴 트럭이 오더라고요. 타라고 해서 탔죠.”
어디서부터 타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차 안엔 황 씨 또래의 소년들 7명이 더 있었다. 용산역에서 출발한 닭장차는 녹번동을 지났다. 황 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경찰이 자신을 집에 데려다주는 줄 알았다고 했다. 이미 경찰서에서 집 주소를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내리라”는 명령에 어리둥절하며 내린 곳은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앞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라면을 사줬던 청년들은 일명 ‘찍새’라고, 부랑아를 경찰에게 인계하는 브로커였더라고요. 제가 길을 헤매고 있으니까 경찰에 팔아먹은 거죠.”
아동 부서에는 직원 두 명이 있었다. 이들은 곧바로 서류 작업을 진행했다. 그들은 황 씨에게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다. 가족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돌려보내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기대는 착각이었다. 공무원으로 보이는 보호소 직원은 “아버지가 계시다”는 대답을 듣고도 황 씨를 그대로 신입 사동에 넣었다. 그렇게 지옥보다 더한 날들이 시작됐다.

“신입 사동에 애들이 50~60명 정도 있었는데, 특공대원 10명이 맡아서 교육했어요. 말이 교육이지 공부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허구한 날 얼차려만 했어요. 매일 아침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교가를 강제로 외웠는데 아직도 기억합니다. ‘삼각산 줄기 기상 받아 너른 물 우리의 보물. 무찔러 가서 보배가 되자. 자라자. 씩씩하게 어깨를 펴고. 손에 손 마주 잡고 나란히 간다…’.”
가사를 틀리거나 외우지 못하면 곧바로 집단 린치가 가해졌다. 특공대원들은 쇠숟가락을 들고 다니면서 목소리가 작은 아이들의 손톱 밑을 숟가락으로 내리쳤다. 날카로운 통증이 손끝을 파고들 때마다 아이들은 교가를 더 크게 울부짖었다.

“기절할 때까지 맞았죠. 담요 때문에 숨이 막히기도 했고 너무 아파서 견디지 못했던 것 같아요. 눈을 뜨니까 4일이 지나있데요. 겨우 일어나서 거울을 보니까 등허리부터 허벅지까지 그냥 새까맣게 피가 죽어 있었어요. 경찰서에서 같은 차를 타고 왔던 형이 그러더라고요. 너 오늘도 안 일어났으면 저 동산에 묻혔을 거라고.”
형이 가리킨 동산은 시설 뒤편의 야산이었다. 형은 그곳을 “비명횡사하거나 맞아 죽은 애들을 묻는 곳”이라고 했다. 실제로 황 씨는 보호소에 있는 동안 이 동산에 관한 소문을 숱하게 접했다. 뇌성마비 환자나 구타로 숨진 아이들 시신을 이곳에 암매장한다는 내용이었다. 보호소 내에서 수많은 아이가 죽었고 그 시신을 매장하거나 불태워 처리했다는 증언은 다른 생존자들 사이에서도 공통으로 확인된다.
이후 황 씨는 다른 사동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제2의 지옥이 시작됐다. 어느 날, 20대 초반의 통장이 황 씨를 방으로 불렀다.
“처음엔 방 청소를 시켰어요. 그다음엔 ‘앉아. 일어서.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같은 기합을 막 주더라고요. 그러더니 ‘지금부터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서 마루 밑에 묻어 버린다’고 협박했어요. 여기 묻힌 애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그렇게 겁을 주고 성폭행을 가하기 시작한 거죠.”
황 씨는 일주일에 4~5일을 불려갔다. 다른 수용자들이 받는 교육도 받지 않았다. “한 번은 방에 갔더니 통장 두 놈이 더 있었어요. 세 명이 집단으로 성폭행을 했어요. 그땐 너무 어려서 ‘아, 나는 좀 있으면 여기서 죽겠다. 죽어서 저기 마루 밑이나 동산에 묻히겠구나’하는 생각만 했어요.”
보호소 직원들은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묵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2025년 진실규명을 신청한 또 다른 생존자 이 아무개 씨 역시 “반장(통장)들이 나이 어린 애들을 성추행·성폭행했으나 담당 직원이었던 수녀들도 호실 내의 이러한 행위들을 모두 방임했다”고 증언했다.
넘치는 수용자에 비해 관리 인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진화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1958년 설립 당시 정원 1000명이었던 서울시립아동보호소는 개소 첫해에 이미 1515명을 수용하며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과밀화는 갈수록 심각해져 1966년에는 수용 인원이 2328명에 달하며 정원의 두 배를 훌쩍 넘기는 최고치를 기록했다. 1975년 마리아수녀회에 위탁 운영이 결정될 당시에도 보호소에는 1684명이 수용돼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을 돌볼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1969년 기준 보호소 전체 근무 인력은 총 78명이었다. 이 중 실제 아동의 생활 지도와 의료를 전담한 인력은 보모 17명과 교도원 2명, 촉탁 의사 2명에 불과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탈출 시도도 빈번했다. “재래식 변기를 통해 탈출을 시도하는 아동까지 있었다”는 증언이 나올 정도였다. 황 씨 역시 입소한 지 두 달여가 지났을 무렵, 다른 수용자들이 교육받는 틈을 타 하수구로 탈출했다.
우여곡절 끝에 보호소를 빠져나왔지만 이후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형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도 사라졌다. 길에서 사탕을 팔던 할머니는 황 씨에게 2000원을 주며 “여동생 고생 안 시켜도 된다. 저기 시골로 보냈다”고 했다. 그렇게 생이별한 동생은 24년이 지나 찾았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는 아버지의 객사 소식을 들어야 했다. 구두를 닦으며 공부를 할 만큼 학업에 열망이 깊었지만 제때 배우지 못 한 것은 평생의 한이 됐다.

한편 지난 2월 26일 출범한 진화위 3기는 부랑인 강제수용소의 국가폭력 및 인권유린 문제를 조사 중이다. 특히 이번 3기에는 국가의 관리·감독 아래 운영된 사회복지기관, 입양알선기관 및 집단수용시설이 구체적으로 조사대상에 포함됐다. 진실규명 대상 인권침해사건의 시간 범위도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이전인 2001년 11월까지로 2기 때보다 8년 이상 확대됐다. 진실규명 신청을 하고자 하는 피해자들은 2028년 2월 25일까지 각 지방자치단체(시·도 또는 시·군·구)와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에 우편 및 방문해 접수할 수 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