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옆을 지나 서울형사지방법원 417호 대법정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법대 앞 피고인석에서 재벌 회장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김영일 재판장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김우중 피고인!”
대우그룹 회장을 불렀다. 김우중 회장이 한 발 앞으로 나와 섰다. 기름기 없는 하얀 머리가 그를 더욱 늙어 보이게 했다.

그 순간 방청석에 있던 한 남자가 손을 번쩍 쳐들고 일어났다. 볼이 움푹하게 들어간 노동자풍의 30대 남자였다.
“재판장님! 김우중은 중동의 근로자를 착취한 사람입니다. 회장 자격이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법정의 공기를 갈랐다. 법정 경비원들이 번개같이 달려와 그의 턱을 잡고 팔을 비틀었다. 그는 끌려 나가면서 악을 썼다. 법정이 다시 조용해지자 김영일 재판장이 말을 계속했다.
“대통령이 뇌물죄로 처벌되는 마당에 재판부는 재벌 회장인 피고인 역시 용서받아선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징역형과 함께 2628억 원의 추징금이 선고됐다. 뇌물로 받은 돈을 국가에 바치라는 의미였다.
“피고인 김우중을 징역 2년에 처한다.”
실형이 선고됐다. 대통령에게 돈을 바친 다른 재벌 회장들이 얼굴이 허옇게 변한 채 얼어붙었다. 나는 하루 8시간씩 진행되는 그 재판을 30회 동안 빠짐없이 방청석에 앉아 기록하며 보았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적 현장을 직접 보고 듣고 싶었다. 3차 공판 무렵이었다. 문영호 검사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물었다.
“노태우 피고인은 대통령 취임 시 도덕성이 높은 신뢰받는 정부, 그리고 정직과 진실을 역설하셨는데 기억합니까?”
“그랬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초 기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저는 재산이라고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선산이 있을 뿐입니다. 재산적 가치는 6억 원 정도입니다. 대통령이 끝날 때까지 단 한 평의 땅도 늘리지 않겠습니다. 그 외 재산도 단 일원도 더 가지지 않겠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었다. 문 검사의 신문이 계속되고 있었다.
“정직과 진실을 주장하던 분이 재벌들로부터 받은 돈들을 통치 자금으로 강변하시는데 그러면 자신이 깨끗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묵묵히 바닥을 내려다보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고개를 들었다.
“저 자신이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모두가 나의 책임입니다. 그들이 와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써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준 사람이 뇌물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걸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대통령 재임 중 쓰다 남은 비자금 2200억 원은 나중에 어디에 쓰려고 하셨습니까?”
“통일을 앞두고 보수 혁신 세력 간 대립이 격화될 것에 대비해 그 돈으로 건전한 보수세력을 지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쓰셔야지 왜 퇴임 후에도 그 돈을 따로 챙겨 이리저리 숨겨놓으셨습니까?”
그 말에 대통령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시 추징 선고가 된 비자금은 전액 국고에 완납됐다는 보도를 봤었다. 나는 그것으로 깨끗이 끝난 줄 알았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 씨의 이혼과 재산분할 소송에서 숨겨둔 불법 자금이 또 드러났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 도중 노 전 대통령 부인의 자필 비자금 메모가 클로즈업되는 걸 봤다.
대통령은 그때 대답하지 못했다. 30년이 흘러, 이번엔 그의 부인과 자녀들이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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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journalist@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