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학원이 밀집한 대치동 학원가에는 ‘임대’ ‘급매’를 써붙인 빈 건물이 눈에 띄게 늘며 ‘사교육 1번지’라는 명성이 무색해지고 있다.
1995년 김영삼 정부는 ‘교육개혁조치’를 단행한다. 대학생 개인과외 금지를 전면 해제하고, 소형 입시학원 형태를 띤 ‘보습학원’을 허용한 것이 골자다. 보습학원 허용 방침은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대치동 일대에 대대적으로 학원타운이 조성되는 계기가 된다. 대형 입시학원 역시 대치동 학원가에 진출해 자리를 잡았지만 곳곳에 생겨난 보습학원이 대치동 학원가의 대세가 된 것도 그 즈음이다. 지난 2000년 4월 헌법재판소가 ‘사교육 금지정책’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것도 대치동 학원가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다.
대치동 학원가는 2000년대 초반과 2009년까지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단군 이래 최악’으로 어려웠다는 2002년 수능이 끝나자 걱정이 된 학부모들이 대치동으로 대거 몰리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여러 교육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대치동 학원가는 끝없이 업그레이드 됐다. 대학마다 논술고사 비중이 높아진다는 정책을 발표하자 2006년 무렵 논술학원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한편, 2008년에는 특목고 우대 정책, 국제중 추진 계획과 영어 교육 강화 방침이 맞물리면서 대치동 일대의 최전성기가 도래했다. 당시 대치동 학원가에선 ‘학원 재벌’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대치동 학원가의 움직임이 최근 심상치 않다. 학원가 일대에 부동산 매물이 급증한 것. 부동산 업자들 사이에선 학원 10개가 개업하면 그중 7개는 문을 닫는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퍼져 있었다. 실제로 기자가 은마 아파트 사거리에 위치한 학원가를 찾았을 때 ‘임대’를 내놓고 공실로 비워둔 옛 학원 건물이 쉽게 눈에 띄었다. 대치동의 A 부동산 업자는 “확실히 매물이 많이 나오고 있는 추세다. 오늘만 해도 학원 2개가 매물로 나왔다”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대치동 학원가의 매물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동산 업자들에 따르면 대체로 ‘경기 침체’ 탓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대치동의 B 부동산 업자는 “경기가 안 좋다 보니 학원들도 어려움을 겪지 않겠느냐. 규모가 작은 영세 학원이 버티지 못하고 매물로 더 잘 나오는 편인 것 같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보는 대치동 학원가의 매물 현상은 조금 달랐다. 경기 침체라는 원인도 있지만 무엇보다 대치동 사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 대치동 학습 컨설팅 전문가인 이미애 샤론 코칭&멘토링 연구소 대표는 “대치동은 정치권의 움직임에 굉장히 민감하다. 입시나 교육정책이 바뀜에 따라 대치동도 변화 중”이라고 밝혔다.
‘임대’를 내놓은 학원.
학원 매물이 늘어나는 이유 중 하나로 외국계 투입 자본의 후유증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대치동의 황금기였던 2006년과 2009년 사이 우리나라 사교육시장에 투입된 외국 사모 펀드 자금은 1조 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손주은 회장이 이끌었던 ‘메가스터디’가 대박을 터뜨리고 프랜차이즈 교육 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경제 위기와 입시 정책 변경으로 거품은 이내 사라졌고, 당시 외부 자금을 끌어 들여 대치동에 학원을 차린 원장들은 자금난에 시달려 영업을 접어야만 했다. 이 대표는 “외부 자금을 무리하게 끌어와 학원을 운영하다가 상황이 안 좋아져 경영 쪽으로 시달린 학원 원장이 꽤 많았다. 지금 임대라고 써 놓은 학원 중 상당수는 외부 자금을 많이 받은 곳일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대치동 학원가는 여전히 교육 1번지로 건재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위기는 맞지만 수요는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입시 전문 O 학원의 한 강사는 “수요가 여전한데 공급이 떨어질 리가 있겠느냐”며 “영세학원이 문을 닫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학원 경쟁력이 떨어진 것이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최신 트렌드를 따라 틈새시장을 노리는 학원들도 생겨나고 있다. 입시에서 면접의 가중치가 높아지는 만큼 스피치 스킬을 가르쳐 주거나 학원에서 토론 대회를 직접 개최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유대인식 토론수업’을 가르치는 학원이 대치동 학원가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탈무드지혜교육학원 김금선 원장은 “창의적인 사고와 가치관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이전 선행식, 암기식의 대치동 교육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라고 전했다.
부동산 업자들에 따르면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대치동 전세를 알아보는 학부모들의 수는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고 한다. 대치동 C 부동산 업자는 “오히려 한번 대치동에 들어오면 웬만해서는 빠지는 법이 없다”며 “대표적인 학원가로 목동, 중계동을 얘기하기도 하는데 아직까지 대치동의 신화는 죽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들어는 봤나? 사커맘·카페맘
영어전문기업 윤선생영어교실이 분석한 신조어 목록에 따르면 ‘어머니’와 관련한 용어들이 가장 많았다. 우선 자녀들에게 엄한 교육을 시키는 ‘타이거맘’이나 시험장까지 따라가 자녀를 뒷바라지해주는 ‘사커맘’이 가장 일반적인 용어다. 대치동 학원가 카페에 모여 입시 정보를 교환하는 엄마를 지칭하는 ‘카페맘’과 ‘아카데미맘’, 엄마의 정보력에 따라 자녀의 스펙관리가 좌우된다는 용어인 ‘엄마사정관제’도 역시 신조어이다.
‘아버지’와 관련한 용어 역시 만만치 않다. 자녀를 대치동에 있는 학교에 보내고 싶어 대치동에 전세를 얻는 ‘대전(대치동 전세)동 아빠’, 엄마보다 더욱 열심히 입시설명회를 따라다니고 자녀를 뒷바라지 하는 ‘대치동 아빠’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압권은 ‘대치동 사교육 성공의 6조건’이다.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 ‘할머니의 운전 실력’, ‘본인의 체력’, ‘동생의 희생’이 그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빠의 무관심이 관심으로 변해야만 대치동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밤 10시 학부모들 차로 아수라장
학원이 끝나는 시간인 오후 10시 대치동 학원가 주변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실제로 대치동 학원가에서 만난 다수의 중·고교생들은 보통 학원을 세 개 이상 다니고 있었다. 학생들끼리 유명한 학원에 대한 정보나 스타강사의 강의 소식들은 이미 충분히 공유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 아무개 양(19)은 “스타강사는 학원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강의를 하곤 하는데 학생들은 자신에게 맞는 강사를 따라다닌다. 보통 한 강의에 100여 명 듣는 것 같다”라고 전했다.
교육 1번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대치동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의 학업 스트레스는 상당했다. 천 아무개 양(17)은 “시험이 끝났을 때는 솔직히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한 애들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며 “나중에 애를 낳으면 절대 이곳으로는 안 오 고 외국에 나가서 살 것”이라고 밝혔다. 김 아무개 군(17)은 “선행학습은 기본이고 학원에서 내주는 과제로 새벽 3~4시까지 공부해도 평범하게 여겨지는 곳이 대치동이다”라며 씁쓸해했다.
오후 8시경, 해가 질 무렵이 되자 학원 간판과 카페에 불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대치동 학원가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학원 근처 카페와 패스트푸드점에는 자녀들을 기다리는 학부모들의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학원 이름은 괜찮았는데 수업은 별로였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있는데 학원은 어디가 좋겠느냐”는 식의 대화가 오고갔다.
학원 수업이 끝날 무렵인 오후 9시 50분부터는 학원가 앞 차도에 승용차와 학원 버스들이 마치 기차처럼 쭉 정차됐다. 한 학부모는 “밤 10시가 되면 전쟁터가 따로 없다. 학원 버스까지 겹치는 날에는 답이 없다”라고 고개를 저었다. 역시나 오후 10시가 되자 학원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차에 타려는 학생들과 빠져 나가려는 차들로 도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불법 정차 단속을 위해 출동한 경찰차는 사이렌을 울려가며 교통정리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강남구청 주차관리과 관계자는 “늘 10시 무렵에 단속을 나가야 할 만큼 교통 정체가 심각하다”라고 전했다.
한편 오후 10시부터는 법적 규정 시간을 어기고 불법 수업을 감행하는 학원들을 단속하는 ‘강남교육청 학원단속반’의 활동 시간이다. 학원단속반 관계자는 “통상 시험 기간 직전이나 신고가 들어올 경우에 집중 단속을 나가곤 한다”며 “많으면 하루 1~2개 정도의 학원이 적발돼 벌점을 부과한다”라고 전했다. 오후 10시 넘어 야간수업을 들어봤다는 천 아무개 양(17)은 “불이 새나가지 않도록 커튼을 치거나 외진 강의실로 학생들을 몰아서 야간수업을 하는 경우가 있다”며 “심지어 강의실은 걸릴 위험이 있으니 계단에서 시험을 보는 일도 있었다”라고 전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