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 <2>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당시 상황을 현장검증하는 모습. MBC 방송화면 캡처. 연합뉴스
저녁식사를 하면서 대통령의 삽교천 행사 소식을 전하는 9시뉴스를 시청하고 일어났다. 집에 도착하니 10시 30분경, 청와대에서 전화가 여러 번 왔다고 했다. 자동차와 호출기로도 여러 번 연락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는 것. 자동차는 퇴근시켰고 호출기는 사무실에 두고 퇴근했기 때문이다.
침실에 들자마자 또 경비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의전수석실 정기옥 행정관이었다.
“수석비서관 전원이 나와 있는데 지금 곧 나와야 합니다.”
“비서실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국방부에 가 있습니다.”
나는 휴전선이 터졌거나 서해 5도가 북의 침공을 받은 것으로 직감했다. 곧바로 나갔으나 제일 늦게 도착했다. 사무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잿빛처럼 침울했다. 전등의 조명마저 가스등처럼 침침하게 느껴졌다. 수석비서관(의전 최광수, 정무2 고건, 경제1 서석준, 경제2 오원철, 공보 임방현, 민정 박승규) 전원이 청와대 비서실장실에 모여 있었다.
유혁인 정무1수석비서관은 김계원 비서실장을 수행하여 국방부에 가 있었다. 누구하나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분위기가 너무나 무겁고 가라앉아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어 볼 수조차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근무했던 내 자리에 앉아 있건만 완전히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어색하고 황량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하고 초조했다. 비서실장이 국방부에 가 있다는 사실은 비상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알고 있었기에 서해 5도에 대한 북한의 무력도발이 있는 것으로 추단하였으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북한의 무력도발이라면 이렇게 침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일 수가 없다. 초조하고 지루한 시간이 약 30분쯤 흘렀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대통령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수석비서관들도 같은 짐작을 했을 것이나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국가원수의 신변에 대하여 공식 확인되지 않은 짐작은 발설할 수는 없는 것. 모두 국방부에 가 있는 비서실장으로부터 무슨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것이 밤 11시경의 청와대 본관 비서실장실의 긴박, 초조, 답답, 침울했던 10·26 사건 당일의 초기 상황이다.
대통령 시해 사건 발생 3시간이 지날 때까지도 대통령 수석비서관과 경호실이 아무런 정보 없이 속수무책의 시간을 보냈다. 밤 11시 30분경부터 수석비서관들의 말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상황분석이 시작됐다. 첫 번째로 무장공비 침투 의견이 나왔으나 곧바로 논의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두 번째로 안가 만찬 중 사고로 대통령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정보부장 사이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다는 것은 수석비서관 모두가 알고 있던 터라 이러한 추론이 의외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만찬 중 차 실장과 김 부장 간에 언쟁이 벌어졌고 급기야 총격사태에까지 이르러 김 부장이 쏜 유탄에 대통령이 피격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에 이견이 없었다. 두 사람 간의 갈등, 암투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유탄을 맞은 대통령의 상태에 대한 가상분석이 이어졌다. 부상이 어느 정도냐, 가료 중이냐, 어디에서 가료 중이냐, 가료상태는 어떠냐 등 각인각설이 오갔다. 서석준 수석이 단편적인 분석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렸다.
“대통령이 부상 상태에 있다면 최우선이 가료다. 그리고 그 가료의 현장에는 비서실장이 반드시 옆에서 지켜보면서 최선의 가료를 독려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시각 현재 비서실장은 국방부에서 열리고 있는 국무회의에 참석중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대통령에 관한 상황은 이미 끝났다고밖에 볼 수 없지 않느냐.”
누구도 여기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침묵이 계속될 뿐이었다. 아무도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밤 11시 45분경 나는 국방부에 가 있던 비서실장 수행비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국무회의가 진행 중이라는 것 외에 별다른 얘기는 없었다. 국방부에 가 있기는 하지만 그 시각까지 사태의 내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비서실장 신변 안전에 만전을 기하라는 막연한 당부를 했을 뿐이다. 27일 새벽 1시경 김 비서실장과 유 정무1수석이 청와대로 돌아왔다. 즉각 수석비서관 회의가 시작되었다.
김 비서실장이 박 대통령의 서거를 공식으로 밝혔다. 김재규가 쏜 총에 돌아가셨다는 말뿐,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추가 설명이 없었다. 참석한 수석비서관들도 아무런 추가 질문을 하지 않았고 신음과 울먹이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비통과 허망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이재전 경호실 차장을 불러 당부했다.
“지금 경호실장이 지휘 불능 상태에 있으니 경호실을 장악하고 경거망동하거나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
이재전 경호실 차장이 사태의 내용에 대해 질문했으나 김 실장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곧이어 김 실장은 대통령 부속실의 전석영 비서관을 앞세우고 박근혜 큰 영애를 만났다. 박근혜 씨는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후 파리 유학을 접고 귀국, 어머니 육 여사 대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아버지를 돕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보도한 <경향신문> 1979년 10월 27일자 호외.
지금은 전설이 된 “휴전선은요?”라고 국가 안보를 제일 먼저 걱정했으니 참으로 침착하고 당차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그 밤 안에 대통령 집무실과 침실의 수습정리에 착수하였으니 실로 초인적인 정신력의 발현이라 하겠다. 대통령 침대 머리맡의 대나무 효자손과 변기 절수용 벽돌 한 장은 이때 발견된 것이다.
10월 27일 새벽 3시경, 대통령의 시신이 국군통합병원분원에서 청와대로 돌아왔다. 10월 하순, 쌀쌀한 새벽공기를 뚫고 대통령의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나는 비서실장과 함께 나가 영접했다. 정식 빈소가 마련될 때까지 우선 소접견실에 임시로 모셨다. 쓸쓸하고 허망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 권위와 위엄이 하늘같던 대통령이 5척 단구의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여 말없이 돌아오신 것이다. 수석비서관들은 손을 나누어 대통령 장조카 박재홍과 대통령 누님들, 김종필, 육인수 등 대통령 친인척들에게 부음을 알리고 야간통행금지시간(자정~4시) 해제 즉시 청와대로 들어오도록 연락했다.
나는 이날 밤 최고의 긴장과 초조, 비통과 허망을 느꼈으며 깊은 심연에 가라앉았다. 5년 동안 끊었던 담배를 그 밤에 두 갑을 피웠다. 그리고 3개월 전에 들었던 주술 같은 대통령 신변이상설이 불현듯 생각났다. 내용인즉 한강에 다리가 11개 놓이면 대통령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 나의 고등학교 동기생인 김 아무개가 위와 같은 예언(?)을 하는 스님이 있으니 참고로 만나 예기를 들어보라고 하여 세종로 근처에서 만났다.
나는 그 스님으로부터 얘기를 듣기만 했을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헤어졌다. 김 아무개 동창생을 통하여 불손한 얘기로 혹세무민하지 말 것과 경우에 따라서는 중대 범죄로 처벌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경고하고 두 번 다시 발설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10·26 사건 3개월 전쯤의 일이었다. 그리고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27일 새벽 그 스님의 얘기가 불현듯 생각나서 한강의 교량수를 세어보았다. 성수대교 준공을 포함해 모두 11개임을 확인하고 내심 깜짝 놀랐다.
내가 스님의 괴담을 들었던 그 무렵 비슷한 내용의 대통령 신변 이상발생설이 유정회 간부회의에서 제기된 바도 있었다고 했다. 경호실에 알리느냐의 여부를 논의했으나 사안이 너무나 중대하고 민감한 문제여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그 처리를 백두진 의장에게 일임하기로 했다는데,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유정회 정책위의장 이해원 의원이 전두환 정권 때 나에게 그 내용을 들려준 바 있다.
그 외 내가 들은 대통령 서거와 관련된 후일담들.
내가 신문기자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던 김 아무개 예비역 대령(육사 5기생)은 10·26 사건 전 평소부터 교류가 깊었던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을 만났을 때 엄지손가락을 세웠다가 아래쪽으로 돌려 누르면서 당분간 서울을 떠나지 말고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다는 것, 그러나 며칠 뒤 고향에 갈 일이 있어 정읍에 내려가 있는데 대통령 유고 방송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얘기도 전두환 정권 때 그 김 아무개로부터 들었다.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냈고 박 대통령 말기 무임소 장관을 지낸 김용태는 평소 주한 근무요원 외에 별도로 한국에 와 있던 미국 안보관계 요원 30여 명이 대통령 서거 다음날인 27일 새벽 오산 미공군기지에서 출국했다는 이야기를 전두환 정권 때 들려주면서 깊은 의문을 표시한 바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역사의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권숙정 씨
나는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렴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
이후 나는 문교부 기획관리실장(1980~1984년), 국립중앙도서관장(1984~1988년), 국립천안공업대학 학장(1988~1992년)을 거쳐 한국장학재단 이사장(1992~1995년)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나는 이제 팔십 노령에 이르러 주변의 이삭들을 주워 모으려고 이 연재물을 기술하고자 한다. 이 이삭들이 역사의 빈 틈새들을 메울 수 있는 작은 조각이 된다면 보람으로 삼겠다.
2013년 9월 서울 상도동 우거에서 권숙정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