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실장은 당직 의무장교에게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몇 번씩 강조를 하면서도 신원에 대해서는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비상 연락을 받고 달려온 분원장 김병수 준장은 대통령 주치의를 겸하고 있어서 대통령의 신체적 특징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서거를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안 사람이었다. 보안사 참모장이 ‘Code 1(코드 원)’이냐고 암호전화를 해 왔을 때 정확히 답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보안사 수뇌부가 가장 먼저, 거의 실시간대에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10·26 당시 유일한 목격자인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사건과 관련해 그의 연루 여부에 대해 조사받고 있다. 연합뉴스
김재규가 육군 벙커에서 체포될 때까지 무려 3시간 동안 국가비상 사태에 대한 정보를 보안사가 독점하고 있었다. 국군통수권자가 부재한 위급한 공백상태였다. 보안사는 기민한 초기대응으로 국가 운용의 주도권을 잡았다. 즉각적인 합동수사본부 설치와 중앙정보부장 겸임으로 국가의 모든 수사력과 정보 기능을 일거에 장악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때부터 사실상 국가 최고 권력자가 됐다. 권력의 추가 한쪽으로 확 기울어 버린 것이다. 대통령 서거 후 불과 이틀 만의 일이었다.
29일 오후 국군통합병원 김병수 준장이 내 방에 들렀다. 대통령 시신을 확인하게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있었던 정보부 요원과의 대결, 엑스레이 원판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 주었다. 박 대통령의 낡은 혁대와 시계, 신체부위의 반점, 탄환의 존치부위, 탄도, 정보부 요원의 감시와 위협을 무릅쓴 보안사 참모장과의 암호전화 통화 등 긴박했던 상항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시계를 잠시 거꾸로 돌려보자. 대만 대사 9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후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경위에 대해서는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당초에는 1978년 12월에 있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기로 하고 지역구(영주·봉화·울진) 다지기 활동을 했다.
이 선거구는 김창근 의원이 오치성 내무부 장관 불신임안 가결을 둘러싼 ‘김성곤 항명 파동’에 연루돼 공화당에서 제명당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곳이다. 선거구 개척을 위해 몇 달 동안 열심히 노력했지만 전임자의 기반이 너무나 튼튼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이 같은 사정을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하소연했고 이어 대통령에게 보고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박 대통령은 9년 수개월을 봉직한 김정염 비서실장(한자로는 김정렴이 맞고 그동안 그렇게 표기해왔으나 본인이 ‘김정염’으로 불리길 원해 그렇게 바꿈-편집자 주)에게 주일본 대사 통보를 했다.
김계원은 지역구 활동 중 밤중에 상경 통보를 받고 야간열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 박 대통령을 단독 면담했다. 단독 면담을 마치고 나온 그는 비서실장과는 만나지도 않은 채 나를 복도로 불러내더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고 말한 뒤 돌아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비서실장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부적격 인사였다.
이 점은 본인도 인정했다. 박 대통령으로부터 비서실장 통보를 받았을 때 본인도 깜짝 놀라면서 국내 사정이 어두워 중책 수행에 자신이 없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제는 잘 돌아가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고…,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나와 말동무나 하면서 지내면 된다”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했다고 뒷날 나에게 들려주었다.
신임 김 실장은 나의 영주국민학교 대선배로서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분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반갑고 믿음직했다. 그러나 9년여의 해외 생활과 어려운 국내 사정을 감안할 때 과연 청와대 비서실장의 중책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없지 않았다.
그는 9년 전 정보부장 1년 미만 퇴임의 1차 검증을 거쳤다. 박 대통령의 각별한 배려로 금의환향, 권좌에 복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비서실장 10개월 만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1979년 6월 19일 김계원 비서실장(왼쪽)이 김포공항에 도착한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를 영접하는 모습.
박 대통령의 재혼 문제와 관련해서는 1977년부터 국내외에서 일방적인 편지 프러포즈가 여럿 있었다. 그중에는 유럽의 수녀 편지와 남미에서 온 것도 있었고 국내 것도 여럿 있었다.
당시 30대 초반의 이혼녀 J 씨는 풍만한 한복 사진을 동봉하는 등 간곡하면서도 유혹적인 편지를 두세 차례 보내온 경우가 있었다. 그 여인은 자기가 소장한 각종 문화재 중에는 국보급 일본 문화재가 많이 있는데 이를 대일 외교에 활용하도록 헌납할 용의가 있다는 것과 대통령의 고독을 달래줄 수 있는 향기를 담은 꽃바구니를 보내고자 한다는 등의 내용을 편지에 담았다.
박 대통령 서거 후 한때 이 여인과의 염문설이 떠돌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적으로 퍼트린 얘기일 뿐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이었다. 나는 그때 자료를 들어 반박할 생각도 해 보았으나 오히려 흥미와 물의가 확대 재생산되어 결과적으로 돌아가신 분께 누를 끼치게 될 것 같아 침묵하고 있었다.
이 여인은 훗날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형 경제 사고를 일으켜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권정달도 이 사고와 때를 같이하여 민정당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다. 나는 이러한 편지들을 비서실장에게도 보고하지 않고 모두 내 선에서 차단하여 폐기했다. 대통령의 심기를 흩뜨릴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김계원 실장의 새 권력을 향한 재벌들의 촉수는 기민했다. S 재벌은 전임 김정염 실장 재직 중에는 강경상업학교 출신의 그룹 사장을 청와대 연락창구로 하더니 김계원 실장이 취임하자 재빨리 동향의 그룹 사장을 연락창구로 변경했다. 그리고는 신임 축하 선물을 하고자 하니 그 의향을 알려달라는 연락이 나에게 왔다.
나는 그 연락사항을 그대로 전했다. 2~3일 후 김 실장은 김은호 화백이 그린 미인도를 지정해 주었다. 그 그림은 고가의 국보급 수준으로 그 재벌 총수가 아끼는 것이었는데 10여 일 후 김 실장 집 거실에 걸려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박 대통령 서거 후 그 그림은 그의 다른 부동산과 함께 합동수사본부에 압수되어 경매 처분되었고 그 재벌이 다시 매수해 간 것은 뒷날의 일이었다. 그림에도 기구한 운명이 있나보다.
그리고 김 실장이 대만에서 귀국하여 마련했던 서울 서초동의 텃밭이 딸린 전원주택과 과천 농장도 압수당했다. 그 전원주택은 김상철 변호사가 법원 경매를 통해 매수했으나 김영삼 정부 때 그린벨트 내의 그 집이 빌미가 되어 서울시장 피명 1주일 만에 낙마했다. 순탄치 못한 그 집의 내력 때문이었을까.
D 그룹은 김 실장의 배재중학교 동문 후배를 앞세워 사무실 접촉이 아닌 자택 출입을 했다.
1979년 들어서면서 박 대통령의 만찬 횟수가 잦아졌고 차지철 경호실장의 월권행위도 심해졌다. 염 실장은 처음부터 박 대통령의 안가 만찬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때는 박 대통령, 차지철 실장, 김재규 부장, 이렇게 세 사람만의 만찬이었으나 차 실장은 술을 입에도 대지를 못했고 김 부장은 간경화를 앓고 있어 실은 박 대통령 홀로 마시는 연회였던 셈이다. 흥이나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계원 실장 때에는 김 실장이 반드시 참석하여 박 대통령의 술동무가 되었다. 두 분의 주량이 비슷하기 때문에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더 편하고 분위기도 더 좋았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권숙정 씨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