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18일 박정희 소장이 육사생도의 5·16 지지 시위를 지켜보고 있다. 맨 오른쪽이 당시 차지철 대위. 연합뉴스
차지철은 5·16 당시 공수특전단 육군 대위로 혁명군에 가담, 박정희 소장과 함께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찍은 사진을 남겼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자택과 경호실 내에 별도의 기도실을 개설 운영했다. 또한 매사에 결벽일 정도로 정리 정돈을 철저히 했다.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그는 대통령이 언짢거나 불편해 할 소지를 사전에 철저히 예방, 차단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인권 압력과 주한미군 철수 위협, 김대중 납치 후 일본의 반한 무드, 국내의 야당·재야·학생·종교계의 반정부 및 반체제 투쟁, 점증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등에 고군분투하는 박 대통령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차 실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편안하게 모셔야 한다고 강하게 다짐했을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 등 외부인사의 접근을 규제하고 안가 만찬의 횟수를 늘리도록 한 것은 아닐까. 안가 만찬은 차 실장 때인 1979년 들어 부쩍 늘어났다. 박종규 실장 때는 거의 없었던 일이다. 국회의원의 경험을 살려 경호실장 본연의 임무 외에 시국과 정치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김정염 실장 재직 중 청와대에는 알력이나 갈등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차 실장이 들어오고 나서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영역 침범, 야당에 대한 정치적인 업무를 둘러싸고 갈등과 불화가 계속됐다. 시국 정보와 그 대처방안에서 차 실장은 강경노선, 김 부장은 온건노선이었는데 대개의 경우 차 실장의 판정승으로 기울었다.
실례로 이철승과 김영삼의 신민당총재 경선에서 김 부장은 이철승의 당선을 기대하면서 온건한 방법으로 대처했으나 차 실장은 직접적으로 강경한 대처를 해 대야 업무에 혼선을 빚게 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내게 했다. 그 결과 김영삼이 야당 총재로 당선됐고 대여 초강경 노선으로 선회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책임은 김 부장의 실책으로 귀결됐고 그를 분노케 했다.
신민당사를 점거 농성 중인 YH 여공 200명의 강경진압을 밀어붙여 여공 1명 사망 등 정국 불안을 증폭시키는 주도적 역할을 한 것도 차 실장이다.
미국의 한국 정부에 대한 지원 중단을 강조한 김영삼의 <뉴욕타임스> 회견과 이에 따른 사대주의 논쟁, 뒤이은 그의 국회의원직 제명, 이에 항의한 야당 의원 일괄사퇴안 제출과 선별수리론 등 초강경 정국이 조성됐다.
차 실장은 여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선별수리론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행을 초래했다. 중진의원 S, 소장의원 L 등 야당 비주류가 차 실장과 빈번히 접촉했고 이를 목격한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증언도 있었다.
이와 같은 정치 간섭과 정보 선점을 위해 차 실장은 경호실 직제 밖에서 별도의 사설 정보팀을 운영했다. 헌병감 출신 예비역 장군 이규광이 팀장이었는데 일과가 끝날 무렵인 오후 6시경 차 실장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나는 퇴근 때 몇 차례 보았다. 이는 중앙정보부의 정보수집 업무와 정면으로 중복되는 것으로, 갈등과 불화의 원인이 됐다.
또한 때로는 김재규 부장을 경호실장실로 불러 정보부의 정보 활동내용을 사전 문의, 탐지하거나 정보의 내용을 자신의 방향과 유사하게 유도하기도 했다. 이런 일로 기분이 상한 김 부장은 김계원 비서실장을 찾아 하소연했고 때로는 분개하는 모습을 나도 몇 차례 보았다.
김재규는 사실 무모하고 저돌적이며 비이성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육군 사단장 시절, 부대 대항 축구시합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자 부대 트럭 수십 대를 동원, 헤드라이트를 켜서 운동장을 밝혔던 그다.
김 부장의 보안사령관 시절 일화 하나 더. 태릉 골프장에서 앞이 밀려 내가 세컨 샷을 기다리고 있을 때 뒤에서 볼이 날아와 내 옆에 멎었다. 알고 보니 김재규 사령관이 친 볼이었다. 불과 몇 분의 짧은 순간을 못 기다리고 앞 팀이 세컨 샷을 하기도 전에 티샷을 한 것이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육군 중장 대 육군 대위, 10년여 연배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만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차 실장에 대해 모멸감을 느끼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최고권력자에 대한 경쟁에서는 누가 먼저, 얼마나 자주 만나 보고하느냐로 판정이 나는 법. 대통령이 집무실로 출근하면 항상 차 실장이 제일 먼저 들어갔다. 비서실장은 그 다음이었고 정보부장은 그 다음이었다. 김계원 실장도 이 점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차 실장은 언론기관장과 국회의원 등 외부 인사를 초청해 국기 하기식을 월례행사로 주관했다. 청와대 앞 경복궁 경내에 주둔하고 있는 수도경비사 부대에서 했는데 여기에 초대됐던 D 언론사 회장은 하기식을 마치고 차 실장 각하라고 호칭, 세간의 웃음거리가 됐다.
차 실장은 종래 육군 소장으로 임명했던 경호실 차장에 육군 중장 이재전 장군을 임명, 한층 위세를 떨쳤다. 나아가 시국 불안을 이유로 수도경비사령부의 지휘권을 경호실장 휘하로 이관했다. 대통령의 안위가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거부할 수없는 명분을 내세웠다.
별도 사설정보팀 운영, 국기 하기식 주관, 육군 중장의 경호실 차장 임명, 수경사 지휘권 이관 등 일련의 조치들은 중앙정보부와의 마찰, 갈등을 심화시켰고 군부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 무렵 차 실장의 친위쿠데타설, 2인자설이 소문으로 퍼지기도 했다. 군의 원로인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이에 대한 시정 요청이 빗발쳤다.
이런 와중에 7월 중순경 나는 경호실장과 정보부장 간에 벌어지고 있는 파워게임의 심각성과 위험성을 김 실장에게 설명하고 업무영역과 역할에 대한 교통정리와 정보부장 교체 등 인사쇄신을 대통령께 건의 조정하라고 진언했다. 얼마 후 김 실장이 “큰일 났다”고 걱정하면서 그 하회를 다음과 같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박 대통령이 비서실장 정보부장 경호실장이 합석한 만찬 자리에서 “여기 있는 세 사람은 이 정권을 지탱하는 핵심 기관의 장이다. 일을 시키다 보면 업무영역을 넘어 시킬 수가 있을 것이나 그것 가지고 서로 다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두 충성심을 가지고 열성을 다해 임무를 수행해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결국 비서실장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 실장의 2차, 3차 건의가 없었던 점이 못내 아쉬웠다.
이철승을 야당 당수로 밀었던 대야 업무의 실패와 간경화로 인한 건강악화 상태인 김 부장의 교체는 시급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인사쇄신은 차일피일 늦어졌고 연말 개각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됐다. 용인술의 귀재요, 의표를 찌르는 선제조치로 기선을 제압해왔던 박 대통령의 조치가 아쉬웠던 시기였다.
뒷날 대통령 서거 후 나는 이 대목을 생각하면서 ‘아! 국운이었구나’라고 혼자서 한탄했다. 이후 김 실장은 국기 하기식을 중단시켰다. 경호실 차장 이재전 중장의 군 복귀도 매듭을 지어 향후 육군 인사 때 반영하기로 하고 대기 중에 10·26이 일어난 것이다.
부마민주항쟁이 터지고 계엄령과 위수령 선포에 따라 시위 진압을 위한 군부대 이동을 실시할 때인 1979년 10월 21일의 얘기다. 군부대 이동을 위해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김용휴 육군 참모차장의 전화를 받았다. 박 대통령은 정보부장, 비서실장, 경호실장과 함께 식당에서 만찬 중이었다.
나는 김 실장에게 육군 참모차장의 전화 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는데 그때 차 실장이 일어서서 식탁을 손으로 치면서 김 부장을 힐난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대통령을 모신 자리에서 저렇게 오만방자할 수 있을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10·26 불과 며칠 전 일이었다.
최고권력자의 사랑과 고무 격려를 받아, 분수와 절제를 잃은 권력은 권력 그 자체의 본성과 관성에 의해 더욱 단선적이고 맹목적인 충성심을 발휘하게 됐고 월권은 더욱 상승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군의 원로이며 박 대통령과는 특별한 관계를 가졌던 이종찬 장군(유정회 국회의원)은 “전에는 대통령과 가끔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요즘은 청와대 셰퍼드가 너무 사나워 접근할 수 없게 됐다”고 박 대통령 말기의 상황을 개탄한 바 있다.
<다음호에 계속>
권숙정 씨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