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4월 박정희 대통령과 큰딸 근혜 양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 일일이 악수로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얼마를 어떻게 성금으로 받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통치자금이 되기도 하고 부정축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같은 물이라도 사람이 마시면 생명수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순수한 성금이냐, 인·허가나 이권과 관련된 거래냐. 위협과 협박에 의한 억지 기부냐, 공적 루트를 통한 성금 접수냐. 비선을 통한 접수냐, 대통령 직접 수수냐. 성금으로서 적정한 액수냐, 천문학적인 액수냐. 공적 또는 국가·사회적 필요에 대한 사용이냐, 사적 호화 지출 내지는 축재형 유용이냐. 유산이 있느냐, 없느냐 등에 따라 통치자금과 부정축재가 구분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박 대통령의 통치자금은 한 점 부끄러움 없다고 확신한다. 역대 대통령들의 행태를 본다면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당시 김정염 비서실장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우고 성금을 운용했다.
△정부시책에 힘입어 이익을 많이 낸 매출 순위 20대 기업으로 한정한 자발적인 성금
△농민, 어민을 대상으로 하는 비료 농약 사료 등 농수산 관련업체 제외(이익을 가급적 농어민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
△20대 기업 내에서도 이익이 나지 않은 기업은 제외
△인·허가 및 이권 관련 대가성과 강제성 철저 배격
△대통령 가족 친지 등을 통한 비선 헌금 철저 봉쇄
△헌금에 따른 혼선과 잡음 방지를 위해 비서실장 단일 창구 유지.
김 실장은 “대통령의 통치자금이 너무 풍족하면 자칫 국가 부패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빠듯하게, 절제되어야 한다”고 나에게 강조한 바 있다. 박 대통령도 이 원칙에 따라 썼다. 일상생활의 근검절약 그대로였다. 김 실장 재직 9년 동안 돈 문제로 불미스런 일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많았던 대통령 지방출장비용도 정부 예산이 아닌, 내가 관리했던 자금에서 지출되었다. 각 수석비서관실의 특별활동비도 이 자금에서 나갔다. 각종 하사금, 격려금, 부처에 대한 특별지원금도 마찬가지였다. 예산국회 때는 그 대책비가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하달되었고 세수 확보 격려금도 국세청에 주어졌다.
과학재단, KAIST 등 나라의 주요 재단이 발족될 경우는 그 발기 출연금이 기부되었다. 문교부의 학원대책비, 새마을지도자 격려금, 군인 경찰 등 안보 관계자에 대한 격려금도 여기에 포함됐다. 새마을·국방 성금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섬유재벌이었던 대농 박용학 회장의 개인 수표가 금고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나는 그 처리지침을 상신했다. “요즘 그 회사 어렵다는데 도로 돌려주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박 회장에게 돌려준 일이 있었다. 대통령 성금에 대해 부도(?)를 낸 일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1977년 어느 날 김정염 비서실장이 500만 원이 든 봉투를 나에게 주면서 “집으로 보내온 것인데 마음만 고맙게 받겠으니 정중히 돌려주라”고 해 동양그룹 이양구 회장에게 돌려주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 서거 후 전두환의 보안사령부는 김정염 실장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 수사했다. 그 경위는 이렇다.
시해사건 전모를 발표하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사진출처=80년보도사진연감
“김 실장의 자금이 명동사채시장에 유통되고 있다는데 알고 있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전혀 근거 없는 모략이다. 말도 되지 않는다. 생사람 잡지 말라. 후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짧은 대화를 마치고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뒤 김 실장이 보안사에 연행되어 조사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필시 모략 때문이라고 직감했다. 며칠이 지나서 그의 요청으로 또 만났다. 다시 대화 내용.
“권형(필자를 지칭) 큰일 났다. 조사를 해 보았는데 전혀 나오는 게 없다. 머리가 정말 좋더라. 뭐는 언제 무슨 명목으로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소상히 기억하고 있더라. 정보가 있으면 좀 알려 달라.”
“거 봐라. 처음부터 잘못 짚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속히 석방하고 잘못을 반성하라.”
역시 두어 마디 대화 끝에 헤어졌다. 그런데 며칠 뒤 나와 친구 사이인 보안사 권정달 정보처장이 점심을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다. 효자동 입구 한식집에 나갔더니 보안사 이학봉 수사처장과 함께 나와 있었다. 이번엔 이 처장과의 대화내용이다.
“큰일 났다. 조사를 해도 나오는 것이 없다.”
“처음부터 당신들이 잘못 짚은 것이다. 그분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청백리다. 부친이 은행 두취(은행장)를 지낸 유복한 가정이다. 돈을 탐할 분이 아니다. 빨리 없던 일로 하고 석방하라.”
“그럴 때는 지났다. 이제 체면 문제다.”
“과오를 과오로 덮을 생각을 말아라. 그분을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된다. 제발 전두환 사령관께 말씀드려 선처해 달라.”
그렇게 점심을 마치고 일어섰다. 골목을 나오면서 나는 친구 권정달에게 다시 한 번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그들은 그분에게 손찌검까지 했다는 험한 얘기를 먼 훗날 들었다.
이무렵 소위 신군부의 이너서클에서 나에 대해서도 조사대상으로 거론했다고 한다. 우연이 그 자리에 참석했던 청와대 경호실 김영호 통신처장(육사 12기)이 “권 아무개는 반듯하고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변호했다는 사실을 10년이 지난 뒤에 전해 들었다. 김 처장이 LG그룹 통신회사 사장으로 재직할 때 내 친구인 김민희 광고회사 사장에게 전한 얘기였다.
나는 1986년까지 청와대 사정비서실의 감시와 도청을 당하면서 마음고생을 했다. 그들은 수많은 산업기지 건설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 건설의 책임자였던 오원철 경제2수석비서관에 대하여 일찌감치 부정축재 혐의를 씌워 수사를 벌이면서 강압과 학대를 했다. 오 수석은 박 대통령이 국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산업기획 설계자이며 군 전력증강사업(율곡사업).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책임자로 효율성과 경제성에 맞추어 열심히 일한 청백리였다.
무도한 폭거였다. 그들은 정의사회를 구현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천문학적 액수의 부정축재로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온 국민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앞서 밝혔듯 박 대통령 서거 후 청와대 금고에서 나온 9억 5000만 원은 대통령 통치자금의 잔금이다. 대통령께서 남긴 유산인 셈이다. 당연히 유족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그러나 엄격히 분별한다면 이중 4억 원은 김계원 비서실장의 비자금이었다. 김 실장이 1년 동안 쓸 판공비적 성격이었다. 나는 이 자금을 김 실장에게 돌려주기보다는 전체를 대통령 통치자금으로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하고 전액을 유족에게 전달했다.
큰 영애 박근혜는 그중 3억 5000만 원을 박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비에 보태 쓰라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전했다. 3억 5000만 원을 받은 전 사령관은 계엄업무 수행지원금조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1억 원,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5000만 원을 전하고 2억 원은 자신이 썼다. 나머지 6억 원은 후원금이 끊겨 경영이 어려워진 무료 노인한방병원 운영비로 쓰였다는 사실을 뒷날 알았다.
이 9억 5000만 원을 둘러싼 말썽은 박 대통령 서거 후 30년여 동안 계속되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5공 청산을 하면서 이 9억 5000만 원이 다시 문제가 된 바 있다. 나는 검찰에 불려가 사실 확인을 위한 참고인 진술서를 다시 써준 일이 있었다. 이때 검찰과 나는 ‘국고에 환수되어야 할 돈’이라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청와대 금고에서 직접 가져간 것이란 진술을 강요받기도 했다.
△한 재벌이 미화표시 100만 달러의 수표를 성금으로 보내왔다. “재향군인회가 어렵다는데 그 기금으로 쓰도록 전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나는 이 수표를 외환은행에서 교환, 재향군인회장에게 전달한 바 있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발생된 뒤 프랑스를 중심한 서유럽 한국 유학생들에 대한 북한 매수 차단 대책이 시급할 때 이들을 위한 장학기금(윤석헌 주불대사 건의) 설립금으로 1차 30만 달러를 보낸 데 이어 연차적으로 지원했다.
△사우디 근로자가 5만 명에 이르는 등 중동 특수가 절정일 때 원활한 공사 및 수주 지원과 근로자 지원을 위한 특별활동비로 5만 달러를 유양수 대사에게 송금했다.
△군 출신 C 대사의 자녀 학자금 지원 요청을 받고 3만 달러 송금했다.
△남베트남(월남) 패망 후 현지에 억류된 이대용 공사의 무사귀환을 위해 박 대통령은 여러 차례 격려의 서신과 함께 비상 활동금을 보냈고 이 공사를 돕고 있던 현지 교민회장 등 관계자에게 활동 격려금을 보냈다.
△그밖에 나는 중병으로 입원 중인 장관들에 대한 대통령의 문병 및 위로금 전달 심부름을 몇 차례 했다. 어려운 군 원로들의 생계비를 지원했고 대구사범 동기생인 석광선의 폐암 치료비도 지원했다. 나는 폐암 치료 경과를 매달 대통령께 보고했고 치료비를 정산했다.
<다음호에 계속>
권숙정 씨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