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납치됐던 김대중이 구사일생으로 생환해 기자회견하는 모습.
이 부장은 진행 중에 있던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정홍진 정보부 국장으로 하여금 북한대표단의 실력자 김덕현(노동당 간부)에게 남북 고위급회담 개최를 제의토록 하여 긍정적 반응을 얻어냈고 이후락 대 김영주(김일성의 동생,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겸 정치위원) 회담 개최합의를 이끌어냈다.
이 부장은 1972년 1월 정 국장을 단신 방북케 하여 ‘이+김 회담’의 절차와 사전준비 작업에 관해 북측과 협의토록 했다. 이어 5월 2일부터 5일까지 이 부장이 직접 극비 방북해 이+김 회담과 김일성 면담을 통해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에 합의했다.
김일성과의 면담은 방북 마지막 날인 5월 4일까지 이루어지지 않다가 자정을 넘기고 5월 5일 새벽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이 부장이 이때 주머니에 넣고 있던 청산가리를 만지작거린 탓에 이것이 녹아서 낭패를 보았다는 얘기를 그가 경기도 광주 도요장(도자기 굽는 시설)에 은거할 때 지인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기를 그 도요장에 자주 출입했던 내 친구에게서 들었다.
사실 5월 2일 오전 ‘적진’을 향한 출발에 앞서 박 대통령은 공산당을 잡는, 대한민국 정보의 총책임자인 이 부장의 신변안전 문제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주한 미국 CIA 책임자에게 방북 사실을 알리고 긴밀한 협조를 구할 수 있도록 공조체제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이 부장도 인질로 잡힐 경우 자결할 각오로 청산가리를 준비해 가지고 간다는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밝혔다.
당시 정부의 통일정책은 △6·25 남북전쟁의 적대관계 해소와 상호신뢰구축 △휴·정전 체제로부터 평화 정착 △가능한 분야로부터 교류협력의 증진 △남북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를 통한 통일이라는 점진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야당 당수가 된 김대중(DJ)은 정부의 통일정책과는 전혀 다른 미국·일본·중국·소련의 4대국 안보보장론, 남북한 UN 동시가입, 연방제 통일론 등을 주장하여 정부를 당혹케 했다.
남북대화의 성공적인 진전을 위해 올인하고 있던 이후락 정보부장으로서는 김일성 유일체제와 고려연방제 통일론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내부결속과 체제강화가 긴요했다. 그런 그가 10월 17일 유신을 주도했다. 계획과 세부작업을 정보부에서 했다.
남북회담은 1973년 8월 23일 북측의 대화중단 발표가 있기까지 국민과 여론은 남북대치 상항에서 곧 가시적인 그 무엇이 이루어지리라는 성급한 기대와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 기대와 흥분만큼 이후락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주변으로 각계 유명 인사들이 몰렸다. 권력서열 2인자의 위상이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혔다.
성급한 후계자설도 나왔다. 이후락으로서는 지극히 조심하고 몸을 낮추어야 할 계제였다.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 유혁인 정무수석 등 대통령 참모들에 대한 우호적인 사적 만남도 몇 차례 있었다. 2인자에 후계자설까지 나오는 그에게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1972년 이후락(왼쪽)이 북한 김일성과 악수하는 장면. 일요신문 DB
이후락이 연루된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 숙청사건이 1973년 초 발생했다. 윤필용은 보안사령관을 거쳐 수도경비사령관 재임 중으로 박 대통령의 총애와 신뢰를 받던 군내 최고 실세였다. 그는 유신 선포 후 유정회 국회의원 선발 시 군 출신의 대거 발탁을 이 부장에게 건의했고 이를 전해들은 박 대통령은 “맡은 일이나 잘하라”고 언짢아했다는 것.
그는 이후락 정보부장을 형님이라 불렀고 친밀하게 지냈다. 유신 초 신범식 서울신문사 사장 주최 만찬에 정소영 청와대 경제수석, 김시진 비서관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의 노쇠 노망 얘기와 이후락 후계론이 설왕설래 되었는데 윤필용이 “다음에는 형님이 해야 합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 달쯤 뒤 박 대통령의 뉴코리아 골프 라운딩에 참석한 신 사장이 그늘집에서 쉬는 동안 “각하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습니다. 주변 측근들을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추궁 끝에 신 사장은 만찬 때 있었던 대화내용을 자백했다. 박 대통령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막강한 병력과 전력을 가지고 수도서울의 경비와 청와대 외곽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군부실력자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보와 권력에 대하여 2인자 후계자설까지 도는 정보부장의 밀착관계에 대하여 권력의 속성을 꿰뚫는, 분할통제 용인할 달인인 박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 두 사람에 대한 신임은 거두어지고 거세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강찬성 보안사령관으로 하여금 윤필용 수방사령관을 숙청했다. 박 대통령의 심기를 가장 잘 헤아린 박종규 경호실장은 이 부장을 정치적으로 견제, 압박했다. 윤필용은 1973년 4월 28일 군사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윤필용과 가까웠던 김연준 대한일보사 사장은 수재의연금 횡령 혐의로 구속됐고(후에 무혐의로 석방), 내가 재직했던 <대한일보>도 폐간됐다.
윤필용의 숙청 과정에서 이후락 정보부장도 함께 해임될 뻔했으나 두 권력기관장을 동시 해임하는 것이 정권안보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김정염 청와대 비서실장의 진언이 받아들여져 이후락은 위기를 모면했다. 윤필용은 먼 뒷날 박 대통령이 자기를 친 것은 2인자 후계자설 등이 도는 이후락에 대해 “까불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후락은 불안 초조했고 박 대통령의 신임회복에 급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무렵, 10월 유신 선포 직전 방일했던 DJ가 일본에 망명하여 미국을 오가면서 극열한 반정부 활동을 계속했다. 재미교포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만들어 그 의장에 추대되었고 망명정부를 세워 그 수반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의 회담을 추진한다는 첩보가 있었다.
이후락 말년 모습.
그날 공보비서실은 김성진 대변인 주재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DJ 납치 외신 전문이 들어왔다. 김 대변인이 그 쪽지를 들고 곧바로 김 비서실장에게 알렸고 이어 박 대통령께 보고됐다. 박 대통령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난감해 하면서 △일본 우익 과격분자의 소행 △재일 거류민단 과격분자 소행 △정보부 공작 △DJ 자작극, 이렇게 네 가지 가능성을 확인하도록 지시하고 어떤 경우든 DJ에게 신체적 위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부장은 자신의 지시로 진행된 DJ 납치 사건에 대해 5일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고 있다가 서울에 데리고 와서야 보고했다.
한일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정부는 김종필 국무총리(JP)를 진사(까닭을 밝히며 사과) 사절로 파견하기로 했다. 김 총리는 다나카(田中) 일본 수상을 관저로 예방하고 진사함으로써 한일 경색국면이 풀렸다. 이 과정에서 홍경모 KBS 사장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NHK 사장을 움직여 수상 관저 예방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후 이 부장은 정보부 국장의 민간인에 대한 월권 독직사건과 관련하여 박 대통령에게 직접 국문을 당하고 여러 관련자를 해직하는 사태를 겪었다. 결국 그 해(1973년) 말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락은 10대 국회의원을 지내다 10·26 사건을 맞이했다.
그는 박 대통령 서거 직후 권력공백기인 어느 날 갑자기 기자회견을 열고 JP 후계자 불가론을 주장, 정가에 큰 충격을 불러 오기도 했다. 부정부패 당사자로 지목되자 떡고물론을 주장하여 한동안 세간에 오르내렸다. 이후락의 DJ 납치와 관련하여 후일 JP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을 저질러 박 대통령도 어떻게 손 쓸 수 없게 함으로서 공동운명체화하려 했던 꾀였다고 평한 바 있다. 문공부 장관을 지낸 김성진은 권력상층부 이너서클 간의 알력과 견제 및 충성경쟁이 빚어낸 과잉충성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한편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락은 경기도 광주에 도요장을 마련하고 철저한 은둔생활을 했다. DJ의 대통령 당선 후 고향 친구이며 DJ의 측근이던 최영근을 앞세워 DJ를 예방 진사했다. 이때 이후락이 많은 재산을 헌납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DJ 재임 중 그에 대한 어떠한 처벌이나 보복 없이 이례적으로 관대하게 넘어갔음은 정치보복 근절 차원에서 다행이라 하겠다.
그의 말년 생활이 곤궁했다는 얘기를 그의 지인들로부터 들었다. 권력무상, 인생무상을 실감케 한다.
<위의 내용 중 일부는 김정염 회고록을 참조하였음…다음호에 계속>
권숙정 씨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