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대에 우리는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 그룹에서 중진국 선두의 자리까지로 끌어 올렸다. 1961년 우리나라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89달러로, 세계 125개 국가 중 101위였으나 18년 5개월이 지난 1979년에는 1510달러, 세계 49위를 기록했다. 1960년대 초 김일성의 북한은 1인당 GNP 350달러 내외로 세계 59위 중진국 수준이었으나 1979년 말에는 세계 120위의 최빈국 그룹으로 전락했다.
1976년 한·미 양군이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에 출동, 삼엄한 경계 속 도끼만행의 발단인 문제의 미루나무 제거 장면. 연합뉴스
하루 수차례씩 거리를 메운 데모가 매일 지속되었고 장면 총리는 데모대 면담 때문에 국정을 볼 수 없었다. 학생 데모대가 국회 본회의장에 진입하여 국회의장석을 유린하는 무법사태가 벌어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곽상훈 국회의장의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 정도였다.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사회의 혼란은 극에 달했으나 국가 지도력은 부재 상태였다. 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기운이 각계각층에 팽배했다.
이러한 때 5·16이 일어났다. 윤보선 대통령마저 ‘올 것이 왔다’고 평했다. 박정희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산업을 일으키고 국가건설을 하려고 해도 자원과 자본, 기술이 없었고 국민적 희망이나 의욕도 없었다. 한일회담으로 받아낸 청구권 자금이 국가재건을 위한 ‘씨드 머니’가 됐고 상업차관과 재정차관을 과감히 도입하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와중에 북의 도발은 끊이지 않았다.
1967년 1월 19일 우리 해군경비정이 북한의 공격을 받고 침몰한 사건에 이어 1968년 김신조 등 북한 특공부대 31명이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월 23일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경비정에 납치되었고 7월 임자도 간첩사건, 8월 서귀포 무장간첩선 침투(12명 사살) 사건, 11월 2일 강원도 울진·삼척지역에 북한 무장공비 100여 명 침투, 다음날인 11월 3일 소대단위 북괴군 중동부전선 침투 등 동시 다발적인 북한의 무력도발이 파상적으로 계속되었다.
1968년 한 해 동안 356건에 달하는 북한의 무력도발과 간첩침투 사건이 일어났고 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69년 들어서도 3월 강원도 주문진 무장공비 출현, 4월 15일 미 공군 EC121 정보기 격추, 5월 김규남 국회의원 간첩사건, 12월 KAL기(승객 승무원 51명) 납북사건이 발생했다. 1970년 격열비도 간첩 침투, 6월 군자만 침투 간첩선 나포 및 동해 간첩선 침투, 해군방송선 피격피랍, 6월 22일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등 북한의 무력도발이 한층 빈번했고 더욱 가중되었다.
김일성의 남침 야욕이 점점 노골화 되어가고 있었고 한반도 전쟁 재발의 위험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때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70년 2월 18일 아시아지역 분쟁에 대하여 △미국 지상군의 불개입 △당사국 자체 방위 원칙을 내용으로 하는 ‘괌 독트린’을 발표한 데 이어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1971년 철수 통보를 한국 정부에 전달해 왔다. 그리고 이 철수 계획은 1971년 3월에 이루어졌고 판문점 구역을 제외한 휴전선 155마일 전 구간 방어 경비를 한국군이 전담하게 되었다.
이에 박 대통령은 1969년부터 불원간 닥쳐올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자주국방 태세의 강화 방안을 강구하는 한편 대미 안보외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펼쳤다. M16 소총 공장 차관 합의를 본 것은 1970년 7월 25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한 달 뒤 8월 2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한한 애그뉴 부통령을 맞이하여 점심도 거른 채 무려 6시간 동안 주한미군 철수를 둘러싼 한미안보협의를 계속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단기간에 걸친 주한미군의 철수가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 유혹과 오판 유발을 가능케 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4만 명 이상의 한국군 월남 파병, 주둔 △김일성의 도발 증대와 준전시 하에 있는 한국의 입장 △동북아와 세계평화를 위한 군사전략 등에 비추어 한국에 대한 예외조치와 선 한국군 현대화 조치를 논리 정연하게 주장했다. 이 회의에서 한·미는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 철수와 1개 사단 계속 잔류를 합의했으나 애그뉴 부통령은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5년 내에 주한미군 모두를 철수 한다고 발표했다.
이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국가 안보를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위험과 약소국의 비애를 통감해야 했다. “자주 국방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라고 그는 비장한 독백을 했다.
“내 집에 불이 났을 경우 먼저 온 가족이 달려들어 전심전력으로 불을 끄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웃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고 이웃들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도와주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도 가족들이 팔짱 끼고 불구경만 한다든지, 성의 없이 한다면 어느 누가 도와주겠는가.”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새 부대기를 수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 대비 자주국방 강화 방안을 강구하는 한편 대미 안보외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펼쳤다. 사진출처=보도사진연감
박 대통령은 또한 포커스레티나 훈련, 프리덤 볼트 작전, 한미연합 방어 및 합동 공수기동훈련 강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에 대한 한미 양국의 전쟁을 각오한 단호한 응징과 결의 표명, 북한의 남침 시 7일 섬멸·격퇴 작전과 박 대통령의 서울 사수 천명, 향토예비군 및 민방위훈련 강화, 군 사기진작과 국민단결 촉구, 국력 집중과 배양의 가속화 등 북한에 대한 군사적, 비군사적 압박을 강화하면서 김일성의 전쟁 의지를 견제했다.
이와는 별도로 박 대통령은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전쟁 방지 및 평화 유지를 위한 다각적인 평화노력을 지속했다. 1970년 8·15 경축사를 통해 △무력도발의 방지 △인위적 장벽의 단계적 철수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간의 체제경쟁(전쟁 대신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하고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여건을 만들 것인가를 경쟁하자는 것) 등을 제의 선언했다. 1971년 6월 비무장지대의 평화이용 제의를 했으나 북측은 이를 거부했다.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회담 제의와 상호 불간섭과 평화공존, 신뢰 회복, 단계적 교류확대, 평화통일 접근을 내용으로 하는 7·4 남북공동성명이 1972년에 있었고 1973년에는 대한민국의 대 공산권 문호 개방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 평화공존의 제도화를 제의한 6·23 선언이 있었다.
그리고 1974년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박 대통령은 △상호 무력 불사용 △상호 내정 불간섭 △휴전협정 유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남북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했다.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는 해를 거듭하면서 평양과 서울에서 지속적으로 열렸으나 북한은 이 기간에 남침용 땅굴을 파고 있었다. 1974년 11월 제1 땅굴, 1975년 3월 제2 땅굴 발견됐다. 그리고 비행기 전차 대포 등 공격용 전력을 휴전선 가까이 남진 배치했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1·21 청와대 습격 사건과 현충문 폭파사건에 이어 세 번째로 1974년 8·15 경축기념식장에서 박 대통령을 저격하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 서거의 폭거를 저질렀다. 이는 박 대통령만 없으면 적화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김일성의 집념의 표시라 하겠다.
여기에 더해서 월남 패망과 캄보디아 공산화 등 도미노 현상에 대한 불안이 확산되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은 극에 달하고 있는 김일성의 호전성과 야만성, 잔인성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 사건은 판문점 미군 관할지역의 시계 청소를 위해 미루나무 절단작업을 하던 미군을 북괴군이 공격, 도끼로 찍어 살해한 사건이다.
박 대통령은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고 규탄했고 미군 대신 한국군이 절단 작업에 나서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피력했다. 한미 양국은 전쟁을 각오하고 항공모함, B52, F111 전투기, 미 해병 상륙대 등 아시아에 배치된 전력을 총동원한 가운데 한국군 특전단 장병들이 들어가서 그 나무를 절단했다.
결국 김일성은 꼬리를 내리고 사과와 유감 표명을 했다. 이때 한미 양국은 북괴군의 저항이 있을 경우 이를 초토화시키고 연백평야를 넘어 38선까지 진격하여 황해도 일대를 탈환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었다.
한편 박 대통령은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남북 간 월등한 국력의 차이가 벌어져 김일성이 감히 전쟁 엄두를 낼 수 없게 될 것이라 보고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건설을 서둘렀다. 국력을 총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국력배양을 가속화했다. 1976년을 고비로 박 대통령의 예상은 현실로 나타났고 남북의 국력차이는 점점 더 벌어져 체제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
1961년 대한민국 GNP 89달러, 북한 GNP 350달러 선에서 출발하여 15년 만에 대역전을 이룬 역사적 쾌거였다.
<다음호에 계속>
권숙정 씨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