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김포지역 모내기에 나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대통령은 매년 모내기 행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해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연합뉴스
“네, 형님 명심하고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1963년 10월 16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 생가에 들렸을 때 큰형님(동희)과 나눈 대화였다. 이때 박동희는 땔감나무를 한 짐 지게에 짊어지고 마당에 들어섰고 두 형제는 마루에 앉은 채 막걸리를 마시면서 첫마디 말부터 농촌과 농민 잘 살게 하는 문제에 화제를 집중했다. 필자는 당시 최고회의 출입기자로서 경주에서 대통령선거 결과를 지켜본 뒤 상경하는 박 의장을 수행하여 상모동에 도착해서 형제가 나누는 대화를 바로 옆에서 들었다.
박 대통령은 5·16 직후부터 농토의 지력 향상과 농업용수 개발, 경지정리를 역설하고 이를 농촌 근대화를 위한 주요사업으로 추진했다. 지력 향상을 위해 퇴비 증산, 흙 섞어 넣기(객토), 깊이 파기(심경), 가뭄에 대비하여 논 우물 파기(관정)와 영농 기계화를 위해 경지정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여 식량증산의 토대를 튼튼히 해 나아갔다. 다수확 통일벼를 1967년부터 전국적으로 보급하게 되었고 영농의 과학화와 경지정리 및 영농기계화의 확대로 쌀 수확이 연차적으로 증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리·잡곡 혼식, 분식 등의 계도와 권장이 시행되었으며 청와대도 이에 솔선수범하여 보리·잡곡밥, 국수, 짜장면 등으로 메뉴가 바뀌었다. 그 중에서도 분식이 대부분이었는데 김정염 비서실장과 나는 점심으로 청와대 식당에서 급식해 주는 국수를 수년 동안 먹었다.
박 대통령은 1973년 다수확 볍씨 개발과 영농기술 지도를 위해 전심전력으로 애쓴 농어촌진흥공사 직원 7000명 전원에게 2개월분의 봉급에 해당하는 특별상여금을 지급하면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다. 해마다 열리는 모내기 행사 때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 농민들과 함께 모내기를 하고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와 점심을 들었던 대통령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정부는 매년 다수확왕을 뽑아 시상하는 등 농민들의 증산 의욕과 경쟁심을 북돋아 주었다. 그 결과 쌀 수확이 해마다 늘어나 1977년에는 수확량 4170만 섬을 넘어서면서 쌀 자급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쌀 자급은 자주경제의 기반이며 식량 무기화에 비추어 자주적인 안보의 또 다른 대들보를 구축한 것이다.
이제는 쌀막걸리, 쌀과자 등 쌀 소비를 권장할 뿐 아니라 남아도는 쌀의 보관 문제로 1년 창고료를 수천억 원씩 지출해야 하는 등 골머리를 앓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 식량 부족으로 200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고 지금도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압록강, 두만강을 넘나드는 북한 동포들의 참혹한 실정과 비교해 본다면 실로 뜻 깊은 위업이라 하겠다.
또한 비닐하우스와 온실 재배의 확대로 겨울에도 야채, 과일, 버섯 등을 생산함으로써 전천후 농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비육우, 내수면 양식, 각종 유실수 식재 등 특별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농촌 소득증대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수 있게 했다. 농촌은 점차 잘 살게 되었고 1974년에 이르러서는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을 웃돌게 되었다. 오늘날 도시에서 농촌으로의 역 귀농 현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때 실로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쌀 증산 계획과 병행하여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일선 공무원과 농민들이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가뭄이 심했던 1967년경 전남지역은 논바닥이 갈라지고 먼지가 날 정도로 물기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대 한발의 참상이 일자, 따가운 햇볕에도 불구하고 논바닥에 우물을 파고 양수기를 돌리며 지하수를 퍼 올리던 그때의 농민과 공무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도지사, 시장, 군수, 농업지도소장 등 모든 공무원들은 얼굴이 새까맣게 탔으며 구릿빛이 나지 않는 기관장들은 박 대통령 앞에서 보고조차 할 수가 없었다. 들판에서 하는 차트 보고가 비일비재했으며 모든 일선 공무원은 농민들과 함께 들판을 헤매면서 관정작업을 지도하고 독려하면서 일했다.
정부는 홍수와 한발에 대한 근본대책으로 196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 주류 4대강인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의 수계종합개발계획을 세우고 홍수 조절과 농·공업 및 생활용수 확보를 위한 다목적 댐 건설을 연차적으로 추진했다.
북한강 수계에는 소양댐 춘천댐 의암댐 팔당댐, 남한강 수계에는 충주댐, 금강에 대청댐, 그리고 영산강종합개발을 위한 장성댐 담양댐 대초댐 동복댐, 낙동강 수계에는 남강댐 안동댐 영천댐 등의 건설이 그것인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모두 착수되었다. 그 결과 1979년 10월 26일 아산만방조제 준공을 끝으로 주요 기간댐 건설을 모두 완성하였고 마침내 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게 되었다.
이로써 전국의 수리안전답 비율은 87%에 이르러 하늘만 쳐다보고 짓던 영농방식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5000년 동안 자연에만 의지했던 홍수와 한발을 극복하고 물을 관리하는 치수의 위업을 그 시대에 이룩한 것이다. 1973년 10월 15일 소양강댐이 준공되던 날 박 대통령은 즉석치사 첫머리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응전으로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는 바위산을 헐고 돌과 흙을 쌓아서 태산을 만들고 강줄기를 막아서 아시아 최대의 사력댐을 건설한 역사적 장거를 이룩하였다. 이것은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인간 의지의 승리를 보여준 것이다.”
TV 중계가 안 되던 시절이라 공보비서관실에서 라디오를 듣던 나는 가슴을 울렁이게 한 그 감동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소양댐 설계 당시 댐 공사는 시멘트 콘크리트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현지에 지천으로 깔린 바위와 돌, 흙을 쌓아 건설하는 사력댐 공법을 제시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시공사 현대건설)의 기발한 발상에 대하여 일본 기술진이 놀라워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울러 이 시대에 이룩한 또 하나의 위업은 산림녹화다. 8·15 해방 이후 혼란기와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국의 산들은 벌거숭이가 되어 황폐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5·16 직후 있었던 태풍 사라호에 의한 산사태로 포항, 영일 일대의 국제항공선 통과지역은 산사태 자국이 나라의 수치가 될 정도로 심했다.
박 대통령은 이 지역을 최우선 사방식수시범지역으로 정하고 민·관·군을 총 동원해 왕모래 사토질인 산등성이에 물과 퇴비를 밑으로부터 운반하여 계획식수를 하도록 독려했다. 진지구축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작업이었다.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이 지역 사방식수작업을 완수하게 되었고 다른 악조건 지역의 사방사업에 새로운 모델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수원의 서울대 농과대학과 임업시험장 등에 사방용 속성수와 장기경제림의 개발육종을 독려하였고 수원은사시나무에 대하여 그 나무를 육종 개발한 현신규 박사의 이름을 따서 ‘현사시나무’라고 명명하는 등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나무를 심는 식목일 외에 심은 나무를 가꾸는 ‘육림의 날’을 별도로 정하여 나무가꾸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나는 이때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동하면서 식목일마다 수원 농촌진흥원에서 현 박사를 비롯한 육종학 교수들을 격려했던 박 대통령을 수행 취재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9공탄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화목 벌채와 낙엽 채취가 현저히 줄어들어 산의 토질개선과 산사태 방지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산림녹화를 가속화했다. 그러나 연탄가스 사고로 목숨을 잃는 참극이 비일비재했는가 하면 어려운 이웃들에게 19공탄 돕기를 하는 등 훈훈한 미담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박 대통령은 산림녹화 사업에 있어서도 선 건설, 후 보완의 고속도로 건설원리를 적용하여 사태방지를 위한 속성수 식목을 우선하되 장기적인 경제림 식재와 밤나무 등 유실수 재배를 병행하여 산림녹화와 소득증대를 기하도록 했다. 밤나무단지에서 대량생산된 밤 소비를 위해 밤과자와 밤통조림을 개발토록 했으며 밤과자 시식회를 청와대에서 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내가 보통학교 다녔던 일제 때에는 집에 간식거리가 없었는데 이제 밤, 대추, 감 등 유실수 재배로 농촌소득 증대뿐만 아니라 우리 어린이들의 간식거리가 많이 생기게 되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 결과 1970년대 하반기에는 전국의 산림이 울창해졌다.
박 대통령과 각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했던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수상은 “한번 파괴된 산림은 그 복구에 수십 년이 걸려도 어려운 것인데 박 대통령이 20년 미만에 산림녹화에 성공한 것은 고도성장과 수출증대, 중화학공업 건설 등 혁혁한 경제 업적보다 더 어렵고 값진 위업”이라고 김정염 주일대사에게 칭송했다.
박 대통령은 녹화에 맞추어 자연보호, 환경보호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으며 전국에 그린벨트를 설치해 살기 좋은 환경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박 대통령의 그린벨트 설치는 국가의 먼 앞날을 내다본 형안의 조치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린벨트가 훼손되고 있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다.
<다음호에 계속>
권숙정 씨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