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제9권에 실린 1972년 경북 청도군의 새마을 운동 모습. 연합뉴스
특히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 방식을 본뜬 경제정책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근년에는 도시 농촌 간, 도시민 계층 간 빈부격차의 심화가 국가적 현안과제로 떠올랐다. 농촌소득 증대와 생활향상을 위한 처방의 일환으로 근면, 자조, 검약, 협동을 일깨우는 새마을운동방식이 원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13개국에서는 연수요원을 우리나라 새마을연수원에 파견하여 연수토록 하거나 우리 새마을운동 봉사단이 현지에 파견되어 실습과 지도를 하고 있다. 관정사업, 간이상수도사업, 공동목욕시설사업, 벼농사 지도(볍씨 소독, 모내기, 물 관리, 병충해 구제 등), 소득증대를 위한 특용작물 재배 기술지도(파인애플, 포도, 양봉 등), 주민들의 위생지도(양치질, 목욕, 소독 등), 간이 건축기술 실습, 간이 영농기계 조작 등을 지도할 뿐 아니라 말은 있으되 글자를 갖지 못한 부족에게는 우리 한글을 전수하여 그들 언어에 접목시키는 문화전파사업도 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을 통한 한글의 국제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 나는 국립중앙도서관장 재직시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렸던 국제도서관장회의에 참석하여 우리 정부기관에서 파견된 공무원이 물이 귀한 고원지대에 우물개발 사업을 지원·지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정부와는 별도로 민간단체와 종교기관에서 선교활동과 아울러 그들의 생활향상을 위한 활동도 보았다. 이렇듯 국제화된 새마을운동의 단초는 수해와 한해를 극복하는 역경의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1969년 8월 경상지역 수해복구현황을 시찰하던 박 대통령은 경북 청도군 신도1리 마을이 다른 지역의 북구상황과는 달리 마을 안길이 넓혀졌고 지붕개량과 담장정리 등 생활환경이 크게 개선된 모습을 보았다. 그 연유인즉 정부 지원을 받아 기왕 수해복구를 하는 김에 주민들이 물자와 노력을 보태어서 살기 좋은 마을환경을 만들자는 주민합의가 이루어져서 협동 작업을 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듬해인 1970년 4월 한해대책 지방장관회의가 열렸을 때 박 대통령은 신도1리의 수해복구 사례를 거론하면서 주민들을 분발케 하여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전개해 나가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어떻게 하면 내면화되어 잠자고 있는 농민들의 근면, 검약, 자조, 협동 정신을 일깨워서 행동화하고 잘 살게 할 수 있을까.’ 박 대통령의 골똘한 생각과 고뇌의 결정(結晶)이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은 처음부터 박 대통령의 발상에서 시작되어 발전전략까지도 그의 구상에 따라 진화되었다. 다시 말하면 박 대통령의 작사·작곡과 지휘·연주로 이루어진 심포니다.
1970년대 중반 공화당 재정위원장이며 쌍용시멘트 오너인 김성곤이 청와대당정회의에 참석했다가 생산된 시멘트의 적체로 인한 업계의 자금난 해소와 시멘트 활용방안의 강구를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에 활용하도록 지시했다. 정부는 전국 3만 4000여 부락에 마을당 300~350부대씩의 시멘트를 배정하고 마을 진입로 확장, 작은 다리 놓기, 우물 개선, 공동빨래터, 공동목욕탕, 지붕개량 등 마을 공동사업을 자주적으로 논의 결정하여 자조적 협동노력으로 해 나가도록 했다.
이것이 1차 새마을 가꾸기 운동의 시작이었다. 2차연도에는 1차년도 때 좋은 성과를 낸 마을에 중점 지원하는 등 경쟁심을 유발토록 하여 잠자던 농민정신을 일깨우게 되었고 마을마다 서로 잘하려는 경쟁이 붙었다. 그리하여 초가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마을길이 넓어졌으며 간이상수도와 전기가 들어갔다. 초가집이 없어져서 농촌풍경이 나지 않는다는 걱정 아닌 걱정의 얘기도 이때 오갔다.
환경개선에 이어 소득증대사업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어 농촌소득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TV 전화 냉장고 등 문화생활화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새마을운동의 노랫소리가 전국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새마을지도자의 성공사례가 쏟아졌고 새마을부녀회의 절미 저축운동이 전국으로 번졌다. 1970년 초 시작된 이 운동은 1974년에 이르러 연평균 농가소득이 140만 원으로, 도시근로자 소득을 웃돌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새마을운동 초창기인 1971년 가을 박 대통령은 목욕 중 미끄러져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고 정양중일 때 새마을운동 노래를 작사·작곡했다. 작사에 대해서는 노산 이은상이, 작곡에는 홍연택 국립교향악단 지휘자가 각각 감수했는데 곡에 대한 홍 지휘자의 부분적인 지적이 있었고 박 대통령이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작사에 대한 이은상의 감수평에 관하여 김성진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노산 선생이 한참 들여다보면서 두세 번 읽어 보더니 ‘한 자 한 획도 손댈 데가 없다. 국가원수의 철학과 신념이 배어있는 글이다’고 격찬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운동 노래는 4절 ‘우리 모두 굳세게 땀 흘려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조국을 만드세’로 끝난다. 이 4절은 1972년 5월 광주에서 열린 새마을소득증대촉진대회 참석 중인 박 대통령이 호텔 숙소에서 작사한 것으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서 김 대변인에게 전한 것이다. 이 대회에서 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명연설을 했다.
청도군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에 보관된 전시물. 전영기 기자
새마을 행사 때의 대통령 연설문은 스피치라이터실에서 준비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모두 박 대통령의 평소 생각과 신념, 철학을 담은 즉석 연설이었다. 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새마을운동에 관한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친필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근면, 자조, 협동. 이것이 새마을 정신이다. 이것이 있어야 새마을운동은 성공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정신계발 운동이고 정신혁명운동이다. 말만 가지고 하는 운동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이 따라야 한다. 정신혁명인 동시에 행동철학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농촌은 반드시 잘 사는 농촌이 될 수 있다.’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국민정신개발을 위한 또 하나의 중추는 정신문화연구원이다. 한국 철학계의 태두인 박종홍 서울대 교수가 대통령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된 뒤 한국정신문화의 개발창달에 관한 문제를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즉 물질문명에 발맞추어 정신문화를 개발하여 두 바퀴가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건전하고 올바른 국가발전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무렵 한국 지식인사회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해외파들이 러시를 이루었고 한국 고유전통이나 문화 역사의식보다는 외국문물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팽배하였다. 해외파들이 곧바로 대학교수 등 지식인사회에 진입하는데 대하여 자주성과 정체성 등 한국인으로서의 가치관확립을 먼저 해야 한다는 준비과정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정상천 청와대 정무2수석비서관이 경기도 일원에 장소물색을 한 끝에 청계산 남쪽 중턱에 터를 잡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박종홍 특별보좌관 사후인 1978년 6월에 준공되었고 초대 원장에 역사학자 이선근 박사가 취임했다.
박 대통령은 개원식 치사에서 “전통문화 개발과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주체적 민족사관을 정립하고 조상의 빛난 얼과 자주정신을 드높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민족중흥에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국적 있는 교육, 호국정신 개발선양, 충효사상 고취 등 고유전통과 문화를 계승 발전시킴으로서 물질문명과 정신문화가 서로 보완 균형조화를 이루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운동이 생활환경 개선과 소득증대를 위한 행동철학이라면 정신문화연구원은 한 차원 높은 주체적 민족사관과 자주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 우리 고유의 전통과 가치 등 민족문화 중흥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1970년대 중·후반 카터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압력과 미 의회의 소위 인권을 빙자한 원조 삭감 압력에 대하여 박 대통령은 안보의 긴박성과 위중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언명했다.
“안보상 중대 위기에 처한 우리의 실정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미 의회 일부가 남의 나라 국정에 대하여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일 뿐 아니라 내정간섭이다. 주권국가로서 외국의 국정 간섭만은 절대로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아무리 경제적 어려움이 크더라도 일체 미 의회에 매달려 애걸복걸하지 말고 원조와 차관 삭감에 대해서는 현금 구매나 제3국 차관 등으로 대체해 나가도록하라.”
그는 뼛속까지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민족주의자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호에 계속>
권숙정 씨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