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광수 검찰총장 | ||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고비처)를 바라보는 검찰의 심리 기상도다.
공직자비리조사처(공비처)라는 직제가 처음 논의될 때만 해도 강하게 반발했던 검찰이 지난달 29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2차 반부패기관협의회에서 고비처의 설치 및 운영에 대한 윤곽이 드러나자 체념과 우려를 거쳐 이번에는 적극 대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신설 논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최초의 논의는 지난 99년 박상천 법무장관 때다. 박 장관은 99년 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검찰 내에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의 비리수사를 전담할 준독립기구로 ‘공직자 비리조사처’를 신설하겠다”고 언급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논의는 지난 5월24일 노 대통령이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를 부패방지위원회 산하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세부 방안을 내달 중순으로 예정된 반부패관계기관협의회 회의에서 보고하라”고 부방위에 지시하면서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검찰은 노 대통령의 이날 언급에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 고비처 설치가 부방위 산하로 간다는 부분 때문이다. 과거에도 검찰 개혁방안 차원에서 고비처나 특별수사검찰청이 거론되기는 했지만 이들 조직은 모두 법무·검찰조직 내에 설치하는 것을 전제로 논의됐었다.
고비처가 대검찰청이나 법무부 직속기관이 아닌 부방위 직속으로 간다는 속내는 무소불위의 검찰을 조사 대상으로 삼겠다는 뜻이란 점을 검찰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이 같은 노 대통령의 언급이 있은 며칠 뒤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은 “노 대통령이 부패청산을 책임지고 하겠다는 언급은 사실상 검찰을 겨냥한 것”이라면서 “검찰도 사정의 성역이 될 수 없다는 게 노 대통령의 소신”이라고 강조했다. 고비처의 주된 수사 대상이 검찰이라는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자 검찰은 “고비처를 만드는 이유가 검사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서라는 것이냐”면서 발끈했다. 한 소장검사는 “법무부에 감찰권을 넘겨 검사들의 비위를 캐겠다는 말이 나온데 이어 이번에는 검사 등을 조사하는 수사기관을 만들겠다는 것은 마치 검찰을 엄청난 비리 집단처럼 매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혹평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송광수 검찰총장이 지난달 14일 중수부 개폐 문제에 대해 강경발언을 한 것도 중수부 폐지가 고비처 신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으로 풀이하고 있다. 당시 송 총장은 “검찰의 권한 남용에 대한 제도적 규제는 받아들이지만 검찰 수사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검찰의 권한 약화를 노린 것이라면 받아들 수 없다”고 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송 총장이 언급한 ‘검찰 수사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바로 노 대통령의 측근들을 지칭한다고 해석했다. 노 대통령의 측근들이 검찰 수사에 불만을 품고, 고비처 신설과 중수부 폐지를 밀어붙이는 것을 송 총장이 지적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자신의 발언에 대한 파장이 예상외로 커지자 송 총장은 이틀 뒤 “저의 발언으로 대통령과 많은 분들께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하면서 파문을 잠재웠다.
검찰은 고비처 신설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흐르자 이제는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기소권이나 영장청구권이 검찰에 있는 한 고비처가 신설돼도 큰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한 부장검사는 “기소권이나 영장청구권이 검찰에 있는 상태에서 고비처가 신설되는 것은 국가정보원이나 국세청 등 특별사법경찰조직이 하나 더 생기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애써 의미를 축소했다.
▲ 지난해 11월3일 부패방지위원회 업무보고에 앞서 이남주 부방위원장(왼쪽)이 노무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고비처 출범을 전후해 검찰이 대대적으로 고위공직자를 수사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다. | ||
우선 검찰 내에서 능력이 있는 검사들은 고비처 파견을 꺼릴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한 법조인은 “조직 내에서 유능한 인재는 그 조직에 승부를 걸려하기 때문에 다른 조직으로 파견가는 것을 싫어한다”면서 “우수한 검사라면 검찰과 경쟁관계에 있는 고비처에 파견돼 친정격인 검찰에 누가 될 수 있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전망했다. 그는 오히려 “검찰 내에서 한직을 전전하던 검사가 공명심에서 고비처를 적극 지원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50명 안팎이 남은 연수원 13기 출신 검사들을 주목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지난달 14일자로 단행된 검찰 중간간부 인사에서 요직에서 누락된 연수원 13기 출신 검사들이 진로를 고비처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능력 있는 변호사를 고비처 수사요원으로 삼기도 쉽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잘나가는 변호사가 급여 수준이 현격히 떨어지는 고비처를 지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건 수임도 잘 안되는 변호사 가운데 고비처 수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사람이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고비처 신설 시점에 맞춰 고비처의 수사대상인 ▲대통령과 대통령의 친·인척 ▲국회의원 ▲차관급 이상 고위공직자 ▲판·검사 등에 대한 사정수사를 검찰이 대대적으로 진행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
최근 8개월 동안 진행했던 불법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나온 고위공직자에 대한 비리수사를 고비처 출범을 전후로 미룬다는 것이다. 현재는 이들에 대한 주변 수사를 충분히 한 뒤 고비처 출범을 전후로 전국 지검·지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수사를 해나간다는 것이 소문의 요체다.
고비처는 출범 이후 성과를 거두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반면 검찰이 고비처의 수사 대상의 비리를 척결하게 되면 고비처는 출범 초기부터 무용론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 검찰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펄쩍 뛰고 있다. 말처럼 범죄수사의 시기 조절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증거 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있을 수 있는데 수사의 시기를 조절할 수는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고비처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전환점은 기소권과 독립성 여부에 달려있다. 아직도 여당 내부에서는 고비처에 기소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야당은 고비처가 대통령 직속으로 존속하면 수사결과에 대한 공정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소권과 독립성에 대한 최종 결론이 나면 검찰 내부에는 또 한 번의 후폭풍이 몰아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