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혈의누>의 한 장면. 조선시대 수사관인 주인공이 살인사건 현장에서 물증을 찾고 있다(위), 조선시대 지방관아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 원고와 피고는 마당에 앉아 재판을 받는다. | ||
유교를 숭상하고 충·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은 ‘양반의 나라’ 조선시대에도 장안을 발칵 뒤집어놓은 끔찍한 살인사건들이 있었다. 그 시절 양반들도 뒤틀린 원초적 욕망과 증오, 살인의 충동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신분을 막론하고 잔혹한 살인으로 이어지곤 했다.
소설가 이수광 씨는 최근 펴낸 책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다산초당)에서 조선조에 벌어진 엽기적인 사건들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서민들의 삶을 역설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이 씨는 이 책에서 <좌포도청등록> <우포도청등록>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당대의 강력사건들을 재구성하고 범인의 검거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추적했다. 또한 각종 검안기록과 살인사건 수사 지침서인 <무원록> 등을 토대로 상상을 뛰어넘는 조선시대의 과학수사와 법의학을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치정과 물욕, 갖은 음모들이 뒤엉켜 벌어진 이들 사건의 이면에는 조선시대 사대부 문화 속에 꼭꼭 숨겨진 피지배층과 여성들의 아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배어 있기도 하다. ‘조선판 살인의 추억’을 한번 들춰봤다.
권력형 스캔들 - 재상 유희서 살인사건
선조 36년 특진관(현 부총리)인 재상 유희서가 휴가 중에 포천에서 도적떼에게 살해되어 조정이 발칵 뒤집힌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경기도 관찰사가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화적 30여 명이 말을 타고 돌입하여 유희서의 가슴을 칼로 찔러 죽이고 말과 옷을 가져갔다’는 것.
강직한 무신인 포도대장 변양걸은 즉시 노련한 수사관인 종사관과 포도부장을 현장에 파견한다. 사망원인은 유희서의 왼쪽 가슴에 난 자상. 변양걸은 한눈에 도적이 저지른 단순한 사건이 아님을 알아챈다. 피살자의 몸에 난 자상으로 보아 칼을 잘 다루는 자의 소행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이때 종사관이 전해주는 충격적인 소식 하나. 유희서가 살해당한 건 첩 ‘애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애생은 원래 의주의 기생인데 유희서에게 첩으로 들어간 여인. 미색이 뛰어나 많은 사대부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며 근자에는 임해군과 간음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는 것. 또한 범행을 한 도적들도 임해군의 가노(家奴)로 알려졌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중죄를 지었더라도 왕조시대에 임금의 큰아들을 신문할 수는 없는 노릇. 포도청이 고민에 빠진 사이 피살된 유희서의 아들 유일이 범인 추적에 나섰다. 그는 첩 애생 등을 염탐하여 임해군과 간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임해군을 뒷조사해 가노 ‘설수’라는 인물이 김덕윤 등을 사주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유일은 김덕윤 일당을 광주 목사에게 고발했고 사건은 마침내 포도청으로 넘어오게 된다.
설수와 김덕윤 등 살인범들은 포도청의 삼엄한 위세에 눌린 탓인지 형추(곤장을 때리면서 하는 신문)도 가하지 않았는데 범행을 낱낱이 자복한다. 가노 설수에 따르면 임해군과 애생이 간음한 사실을 안 유희서가 임해군에게 항의하자 임해군이 가노 30명을 보내 살해했다는 것. 그러나 범행에 가담한 네 명의 증인 겸 하수인들이 포도청 옥사에서 감쪽같이 살해를 당하면서 엄청난 반전이 이뤄진다.
선조는 포도청 옥졸과 관리들을 처벌하고 사건을 의금부로 이첩토록 한다. 의금부 문초에서 가노 설수는 이전의 자백이 포도청의 고문에 못이겨 나온 것이라며 진술을 뒤집었다. 선조는 아들 임해군을 보호하기 위해 유희서의 아들 유일에게 음해죄로 중벌을 내리고 포도대장 변양걸을 멀리 귀양 보낸다. 유희서 살인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리지만 결국 임해군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역모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사약을 받고 죽고 만다.
▲ 정약용의 <흠흠신서>(왼쪽)는 형법은 물론 수사과정과 시체검험 등 법의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오른쪽은 조선시대 살인사건 수사지침서로 사용됐던 법의학서 <증수무원록>. | ||
정조 11년 강원도 안협에서 양반 이언이 문중 사람들과 함께 조카며느리 ‘구 소사’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70세 노인인 이언은 조카가 죽고 과부로 혼자 살고 있는 구 소사가 음란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중회의를 열어 살해를 결정했다. 결국 일가 친족들은 억울함을 강변하는 구 소사에게 재갈을 물리고 온몸을 칡넝쿨로 묶은 채 강제로 자루에 넣어 강에 던진 후 10여 개의 돌덩이를 얹어 살해했다. 죄목은 ‘집안망신’. 문중의 명예를 위해 시댁 일가 친척과 친정 오라버니까지 담합해 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같은 흉흉한 소식을 들은 안협 현감은 사체를 찾아내 부검을 한 뒤 타살임을 확인하고 살인을 주도한 이언과 구 소사의 오라비 구성대를 불러들여 신문한다. 안협 현감은 살인사건 내용을 경기도 관찰사에게 보고했고, 관찰사가 곤장을 때리며 신문하던 중 구성대는 장독으로 죽고 만다.
임금 정조의 지시에 따라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이뤄지고 이언이 범행을 주도했음이 밝혀진다. 형조에서는 이언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이번에는 ‘한 건의 옥사에 두 명을 사형시킬 수 없다’는 법리 논쟁이 다시 벌어진다. 또 한 명의 주도자인 구성대가 이미 옥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사건은 결국 정조가 직접 ‘곤장을 때리고 이언을 석방하라’는 교지를 내리면서 막을 내린다. 이 시대에는 남편이 있는 부인은 물론이고 남편이 없는 과부라도 간음을 하면 ‘자녀안’(양반가 여자로서 품행이 나쁘거나 세 번 이상 개가한 이의 소행을 기록한 문서)에 올라 후손이 출세를 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했다. 이 때문에 사대부가의 사람들은 집안의 여자들이 음란한 사건에 휘말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구 소사 살인 사건 역시 이 같은 양반사회의 ‘규율’ 때문에 빚어진 시대의 비극이었다.
간음 복수극 - 종친 이석산 살인사건
간음에 의한 살인사건은 조선시대에도 빈번했다. 특히 치정이 얽힌 살인사건의 경우 여느 사건보다 잔혹하고 엽기적인 성격을 나타내기도 했다.
세조 1년 12월 한양 반송정 아래에서 한 남자의 시체가 칼로 난자당하고 눈이 도려지고 음경이 베어진 참혹한 상태로 발견됐다. 그는 왕실의 종친으로 권세를 부리던 이석산. 그가 공신인 재상 민발의 첩 ‘막비’와 간통해온 것으로 밝혀지면서 용의자는 민발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민발이 살인하는 것을 본 목격자가 없었다.
형조를 담당하는 동부승지 이휘는 어명에 따라 이석산의 시체를 복검(사체를 두 번째 검사하는 것)하고, 살해 현장으로 추정되는 첩 막비의 집을 수색했다. 막비의 집 곳곳에 흘린 피를 닦아낸 흔적이 남아 있었고, 집안에서 찾아낸 철창의 날과 이석산의 사체에 남아 있던 자상의 형태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는 말썽 많던 왕실 인물이고 가해자는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공을 세운 공신이었다. 활의 달인인 민발의 재주를 아꼈던 세조는 증거물이 발견됐음에도 ‘목격자’가 없고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민발을 보호하려 했다.
이 잔혹한 치정극은 결국 세조가 사건을 잘못 조사했다는 이유로 동부승지 이휘를 파직함으로써 일단락된다. 세조가 살인죄까지 눈감아주었던 민발은 그뒤에도 방자한 행위를 일삼다가 세조의 화를 사서 멀리 귀양 가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부인이 간음하는 현장을 목격하여 살인을 하면 정당방위로 인정했다. 이석산 역시 자신의 첩과 간음하는 현장을 목격한 민발에 의해 살해됐던 것이다. 한 여자를 두고 벌어진 칼부림은 시대와 신분에 상관없이 일어나는 치정살인극의 실상을 말해준다.
▲ 소현세자와 세자빈이 인질로 와 있던 심양관 자리.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귀국하였으나 인조에게 냉대를 받다가 병을 얻어 급사했다. | ||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여성의 질투가 빚어낸 살인사건도 있었다.
성종 5년 10월 흥인문 밖 야산에서 한 젊은 여인이 피투성이 시체로 발견됐다. 머리가 깎이고 온몸이 흉기에 찔리고 가슴과 얼굴, 음문이 지져진 상태로 발견된 이 사체는 한성부 북부에 사는 참봉 신자치의 여종 ‘도리’로 밝혀졌다.
수사 결과 범인은 신자치의 부인과 장모로 드러났다. 신자치는 여종인 도리의 출중한 외모에 흑심을 품고 겁탈, 이후 그녀를 성적 노리개로 삼아 욕정을 풀곤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신자치의 부인 숙비가 질투에 눈이 멀어 도리에게 ‘꼬리쳤다’는 누명을 씌워 끔찍한 고문을 가하며 살해했던 것이다.
의금부의 조사를 받게 된 숙비는 “소인이 어미와 함께 도리를 발가벗겨 묶어놓고 얼굴, 가슴을 꼬집고 때린 뒤에 쇠를 달구어 지졌다”며 “남편의 사랑을 받는 도리가 미웠다. 두 눈이 멀고 두 귀가 먹어 그런 짓을 했다”고 실토했다. 숙비의 잔인한 행각은 ‘가장이 관사에 고하지 아니하고 노비를 구타해 죽이면 장 100대에 처한다’는 율에 해당했지만, 숙비는 사족(문벌이 높은 집안)의 딸이라는 이유로 경상도 안음에 부처(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형벌)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도리 살인사건은 당시의 사회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조선시대 여종들의 처지는 남자들에게는 성적 유희의 대상에 지나지 않고 여자들에게는 사유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성여학의 <속어면순>에 실린 바로는 여종을 겁탈하는 방법인 ‘십격묘법’(十格妙法)이라는 말이 당시 양반가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하니 이 시대의 여종에 대한 인식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사채의 덫 - 귀영 살인사건
숙종 3년 12월 한양 성 밖에 목을 매어 자살한 것처럼 위장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됐다. 죽은 여인은 상인 김제원의 처 귀영. 참봉 이인한은 사채를 빌려준 김제원이 돈을 갚지 못하자 처인 귀영을 잡아다 한 달 반이나 채찍질을 했고, 매질을 견디지 못한 귀영이 죽자 목을 매달아 자살로 은폐시킨 것이었다.
이인한은 극구 범행사실을 부인했으나 타살을 증명하는 검험 결과와 고문을 견디지 못한 이인한의 하인들의 실토로 전모가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조정에서는 이인한의 처벌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다. 귀영을 죽인 것은 이인한이 아니라 하인들이니 이인한을 관대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과 사사로이 사람을 죽였으니 중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섰다.
형조에서는 이인한의 죄를 ‘위핍치사율’(위협하고 핍박하여 죽게 만든 죄에 대한 법률)로 의논하여 ‘장 100대, 은 10냥으로 속량’을 결정했다. 위핍치사율은 공포를 가해 죽게 만들었다는 기이한 죄목인데 은 10냥을 바치면 죄를 사해준다는 것이었다. 이에 사헌부에서 일제히 반발하고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자 결국 이인한은 귀양을 가게 된다.
조선시대에 사채 피해가 컸다는 사실은 실록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양반이나 토호들이 상민들에게 빌려주는 사채의 이자는 연 1~2할이었으나 나중에는 5할까지 치솟아 현대의 사채 이자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사채 이자의 상한선을 2할로 못 박기도 하고 흉년에는 ‘사채동결령’을 내리기도 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금업법에 따르면 사채 이자 최고 한도가 연 6할에 이르는 것을 감안할 때 현대의 법이 조선시대의 법만도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생불이다 - 사이비 교주 사기사건
시대를 막론하고 사이비 종교는 인간의 여린 마음을 파고든다. 특히 흉년이 들고 관리들이 수탈을 일삼는 등 시기가 어려울수록 종교는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혹세무민한다. 비록 살인사건은 아니지만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기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요승 손처경 사건’이다.
조선 숙종 때 손처경이라는 20대 젊은이가 신승으로 위장하여 수많은 부녀자를 농락하고 자신이 왕실의 유복자라고 임금에게까지 사기를 치려다가 들통이 나서 처형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생불이라고 주장하는 손처경에게 현혹되어 몸과 재산을 바쳐 불로장생과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손처경이 양치질한 물과 목욕한 물을 마시면 불로장생한다는 말에 백성들이 다투어 그 물을 사서 마시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또 주야로 남녀가 모여 수청을 들고 혼음도 서슴지 않았다. 그에게 현혹되어 몸을 바친 여자들 중에는 양반가 부녀자들도 적지 않았다.
손처경은 결국 자신이 소현세자(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인조의 큰아들)의 유복자라고 거짓 주장까지 일삼다가 죽음을 맞고 만다.
이수향 기자 lsh@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