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서울중앙지검에 도착한 김경준 씨. 그는 취재진을 향해 전혀 피의자답지 않은 함박웃음과 여유를 보여줬다. | ||
BBK 의혹사건의 핵심 인물 김경준 씨(41)가 지난 11월 16일 국내에 인도된 이후 보여준 튀는 언행과 독특한 제스처를 두고 갖가지 해석이 흘러나오고 있다. 도대체 김 씨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과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KO패’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일까, 아니면 사기꾼의 마지막 여유일 뿐일까.
국내로 신병이 인도된 이후 언론에 노출된 김 씨의 언행들은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김 씨는 입국할 때부터 얼굴 가득 환한 함박웃음을 짓는가 하면 검찰청사에 몰려든 취재진들을 둘러보며 ‘와우!~’라는 과장된 미국식 감탄사를 터뜨리기도 했다. 검찰청사로 들어가기 전 심경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김 씨는 “한마디만 할까요?”라며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다 조사관들에게 제지를 당했다. 또 구속영장이 청구된 19일 새벽 김 씨는 구치소로 향하면서 수갑을 찬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는 돌출행동을 하기도 했다.
김 씨가 보인 언행들은 주가조작과 횡령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범죄 피의자라기보다는 팬들을 맞이하는 톱스타에 가까웠다. 김 씨가 보여준 표정과 액션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혹자는 김 씨의 행동 하나하나에 굳이 정치적인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속 상태가 된 김 씨가 언론에 노출되는 시각은 검찰청사를 드나드는 몇십 초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의 이런 특이한 언행은 자신의 심정과 각오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경찰대 표창원 교수는 “김 씨의 납득하기 힘든 제스처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자신의 책임을 경감시키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표 교수는 “김 씨는 마치 ‘나는 이 사태에 대해 주된 책임을 질 사람이 아니다. 주 책임자는 따로 있다’는 심리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엔 책임을 회피하는 동시에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결합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김 씨가 전략적으로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기간 미국에서 살아온 그가 지극히 미국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즉 유죄판결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죄인인 양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김 씨가 섣불리 죄인으로 인정받지 않도록 스스로를 방어·보호하기 위한 제스처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표 교수는 “미국에서는 김 씨가 보인 행동들은 OJ 심슨이나 패리스 힐튼의 사례로 볼 때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표 교수는 김 씨의 이런 언행들이 한때 금융계의 기린아로 탄탄대로를 달려온 그의 행보나 전력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김 씨는 미국 코넬대 경제학 학사, 시카고대 경제학 석사,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은 뒤 모건스탠리에 들어가 ‘30대 투자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아비트리지(차익) 거래에서 두각을 나타낸 ‘경제전문가’였다. 표 교수는 “김 씨가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진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 괴리감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김 씨는 여전히 스스로에 대한 강한 믿음과 확신을 갖고 있는 듯한데 타인 역시 그렇게 봐주길 바라는 욕망이 내재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김 씨가 국내에서 보인 언행과 관련해 “김 씨가 현재 보는 것은 자신의 죄(혐의)가 아니라 자신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말 한마디에 국민의 눈과 귀가 쏠려 있는 현재 상황을 김 씨 스스로 실감하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행동들이라는 것이다. 황 교수는 “자신이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미칠 어마어마한 파장을 잘 알고 있는 김 씨는 자신이 한 나라의 대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최대 변수로 떠오른 현재 상황을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며 “김 씨는 현재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의견을 밝혔다.
몇몇 신경정신과 전문의들 역시 김 씨가 죄책감을 느끼는 대신 자신을 ‘킹메이커’로 여기는 그릇된 영웅심리에 빠져있는 것 같다는 의견을 보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김 씨의 행동들이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상 자포자기 심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한 정신과 전문의의 견해를 들어보자.
“김 씨의 부모는 이민을 간 후 갖은 고생을 해가며 김 씨 남매를 뒷바라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학창시절부터 수재로 이름을 날렸던 김 씨는 명실 공히 부모의 기대에 부응한 엘리트 아들이었다. 실제로 언론에 공개된 김 씨 아버지의 인터뷰에서도 아들에게 갖는 신뢰와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김 씨의 성장환경을 볼 때 그는 자존심이 강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굉장한 가치와 평가를 내리고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유망한 경제전문가에서 졸지에 국제사기꾼 혐의를 받게 된 자신의 처지가 김 씨로서는 믿을 수 없고 더없이 한탄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김 씨는 혐의가 적용될 때 되더라도 망가진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타인에게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어필하고자 하는 심리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상당수 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전문의들은 공통적으로 “김 씨가 겉으로는 여유만만하고 당당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그 속은 결코 편하지 않을 것이고 실제로 그가 보여주고 있는 의외의 모습들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한편 김 씨가 매사에 실익을 추구하고 철저하게 이해타산을 따지는 경제전문가로 활약해왔던 점으로 볼 때 김 씨의 귀국 및 귀국 후에 보여준 제스처들을 그의 머릿속에서 계산된 것으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는 2004년 5월 미 FBI에 체포된 뒤에도 ‘인신보호’ 청구를 법원에 제기해 송환에 응하지 않고 미국에서 버텨왔던 김 씨가 돌연 한국 송환에 응한 배경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즉 김 씨가 받고 있는 혐의는 미국에서도 중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대범죄로 두 차례 인신보호 신청이 기각된 김 씨가 더 이상 버텨봤자 이득이 없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또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자신이 재판과정에서 입게 될 불이익을 예상하고 내린 ‘고육지책’일 수도 있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