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여자는 두근거리는 감정을 억제하며 그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린다. 드디어 그 남자가 여자한테 꽃다발을 안기는 순간이었다. 그 여자 왈, “천수, 너 이거 시상식때 받은 꽃다발이지?” “아냐, 정말 누나 주려고 사온 거라니까.” 이번 취중토크의 주인공은 바로 이천수(22•울산 현대)다.
‘취중토크’ 역사상 취재원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은 게 처음이라 당황, 기쁨, 황홀, 이런 순서대로 감정이 흘러가면서 기분이 상당히 업그레이드 될 수밖에 없었다.
올 한 해 누구보다 다사다난했던 터라 2002년의 끝자락에 서 있는 이천수의 얼굴에선 감회에 젖은 감상들이 뚝뚝 묻어난다. 스스로 ‘당돌하다’고 말할 정도로 거침없이 의사 표현을 하는 이천수와의 ‘취중토크’는 ‘당돌한’ 남자와 ‘당돌하고 싶어하는’ 여자와의 진실 대담이었다.
달리는 폭주기관차처럼 숨가쁘게 달려온 시간들이었다.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굵직굵직한 대회도 있었고 K리그에서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며 우승팀 성남 일화를 바짝 ‘쫄게’ 만들기도 했다. 이천수의 활약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대표팀에서나 소속팀에서 펄펄 날았다. 2002년 한 해를 ‘요점 정리’해달라고 주문했다.
“월드컵의 영광과 흥분도 컸지만 힘들게 치른 아시안게임에다 올 한 해 두 차례나 유럽 진출이 좌절된 데 따른 상처 등으로 인해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그래도 연말에 신인상 등 큰 상을 여러 차례 수상해 위안을 받았어요. 기쁜 기억, 슬픈 느낌들을 다 떨쳐버리고 지금은 웃고 있는 거죠.”
이천수는 월드컵 이후 K리그에서 훨씬 좋은 모습으로 소속팀에 대단히 영양가 있는 플레이를 펼쳤다. 축구인들은 ‘이천수가 달라졌다’며 놀라워했고 그라운드 안팎에서 보여준 성숙한 태도들은 그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기에 충분했다.
“골 욕심이 많다는 지적이 있었어요. 난 축구선수고 공격을 맡았는데 골 욕심이 없으면 어떻게 축구를 하는지 의문이 들었죠. 요즘에는 경기 나갈 때 내가 믿는 종교에 모든 걸 맡기고 나가요. 부담 갖지 않고 순리대로 풀어나가려고 하다보니 순조롭게 경기가 진행되는 거예요. 물론 (유)상철이형의 도움도 컸지요. 수비가 형한테 쏠리는 바람에 나한테 골 찬스가 많이 났거든요.”
▲ 기자에게 꽃을 선물한 이천수와 매니저(왼쪽). | ||
“워낙 솔직한 성격 때문에 그런 얘길 듣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날 잘 아는 사람들, 나와 친한 사람들 중에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 믿습니다. 날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지 않아요. 그리고 내 앞에서 ‘싸가지’없게 구는 사람들한테는 일부러 더 ‘싸가지’ 없게 굴어요. 얄미우니까.”
이천수한테 빠질 수 없는 스토리, 술에 관한 에피소드다. 다른 데도 아닌 술 세기로 유명한 고려대 출신이 아니던가. “신입생 환영회 때였어요. 생맥주 3천cc를 원샷시키는데 왜 그렇게 양이 많은지, 트림은 나오지, 술은 집어넣어야지, 안 마시면 맞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쉽게 회복이 되지 않더라구요. 대한민국 술은 혼자 다 먹은 기분이었으니까.”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술 때문에 아찔한 경험을 했다. 고려대에서 월드컵 4강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모교 출신의 축구인들을 초청해 행사를 가졌다. 차범근 전 감독, 홍명보, 차두리 등 선배들이 모인 자리에 이천수는 술이 채 깨지 않은 상태로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전날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부킹도 들어오고 ‘필’이 꽂히는 바람에 술을 엄청 마셨어요. 다음날 오후가 돼도 술이 안 깼으니까. 행사에는 빠질 수가 없어 참석은 했는데 가관이 아니었죠. 다들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는데 나 혼자 전날 입은, 구겨질대로 구겨진 캐주얼 의상에다 머리는 쑥대밭이 된 상태였거든요. 모두 한심하다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자신과의 약속을 어겨 한동안 속이 상할 대로 상했다고 한다. 원래 시합 전이나 중요 행사를 앞두고서는 망가지지 않는다는 게 철칙이었는데 월드컵의 감흥이 쉽게 자제력을 잃게 만들었다는 것. 이천수와 함께 온 매니저 송대한 팀장((주)스카이콤)도 얼큰하게 술에 취했다.
이 대목에서 여자 얘기가 빠질 수가 없었다. 얼마전 목걸이를 선물한 주인공으로 보도된 미스코리아 출신의 K양에 대한 궁금증을 늘어놨다(<일요신문> 552호 보도). 이천수, 대뜸 하는 말이 “어떻게 아셨어요?”다. 그러자 매니저가 기자의 친척이 ‘정보과’에 있다며 한수 거든다.
“설명할 만큼 오래 사귄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우연히 만났다가 4개월 만에 헤어진 거니까. 내가 원래 키 큰 여자를 좋아하거든요. 키도 컸고 몸매도 빼어나고 얼굴도 예쁘고,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하지만 성격 차이라는 거, 정말 있더라구요. 편하게 만나고 싶었는데 자꾸 이런저런 간섭을 하려고 해서 그만 만나자고 했죠.”
이천수는 지금까지 첫사랑 외엔 사랑해본 여자가 없다고 한다. 만약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날 경우엔 반드시 결혼할 거라고. 그래서 쉽게 사랑하지 못한다는 아리송한 대답을 내놓는다. “지금까지 신문에 오른 스캔들은 모두 ‘구라’예요. 다 ‘뻥’이고. 만약 진짜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여자가 생길 경우 <일요신문>을 통해 알릴게요. (기자한테) 소개시킨 다음 맘에 든다면 공식적으로 인터뷰하겠다니까.”
이천수의 꿈은 놀랍게도 대통령이었다.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지 않는 대통령, 서민 출신으로 국민들의 속깊은 어려움까지 긁어줄 수 있는 대통령, 밑에 있는 사람이 비리를 저지를 경우 누구 탓을 하기 전에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대통령’을 꿈꾸고 있었다.
“월드컵을 통해 외교적인 문제가 풀리듯이 축구선수 출신의 대통령이 나올 경우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좀 더 쉽게 풀리지 않겠어요?” 정말 ‘당돌한’ 이천수였다. 그가 갖고 있는 포장이 몇겹 정도는 풀린 기분이었다. 단순히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