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풍당당’으로 대변되는 양준혁은 이제 ‘부드러 운 남자’로의 변신을 꿈꾼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번 시즌 올스타 투표에서 역대 최다 득표를 하며 화제를 모았던 양준혁(34·삼성). 그는 누구보다도 골수팬들이 많다. 선수 자신이 반골 기질로 대표되는 성향이라 그런지 몰라도 ‘한번 팬은 영원한 팬’이라는 양준혁의 추종자들은 설령 그가 엎어지고 넘어진다 해도 흔들림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마이웨이’ 스타일이다.
지난 15일 대구 경산볼파크 인근 음식점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웬만큼 흥이 나지 않으면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 성격이라 인터뷰 초반엔 다소 고전했지만 양준혁은 잘 마시지 못하는 술을 한 모금 털어넣고 나서 녹록지 않았던 자신의 야구 인생을 마치 글을 쓰듯 풀어냈다.
“전 야구를 통해 많은 꿈을 이뤘어요. 도저히 운동을 할 수 없는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야구를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목표를 세웠는데 지금은 거의 다 달성했거든요. 무슨 꿈이었냐구요? 집을 사고 싶었고 차도 있었으면 했고 마지막으로 삼성 유니폼을 입는 거였어요. 대구에서 야구하는 선수치고 삼성 유니폼을 꿈꾸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그런데 우스운 게요, 다 이루긴 했는데 그래도 욕심이 나더라고요. 더 넓은 집, 더 좋은 차, 더 많은 연봉, 뭐 이런 것들이죠.”
양준혁은 데뷔 11년째를 맞는 프로 야구 선수 생활에 대해 이런 만족감을 나타냈다. 그래서 야구를 시작하면서 부모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뜻을 굽히지 않았던 오기와 투지를 사랑한다고 했다. 독특하다고 소문난 양준혁의 야구 색깔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기자한테 자신의 야구 색깔이 어떤 것 같냐고 되묻는다.
“야구를 쉽게 하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정교함과 깊이가 있는 거 아닐까요?”라며 얼버무리자 “팬들은 내가 야구하는 걸 보고 되게 재밌어해요. 난 진지하게 슬라이딩해서 공 잡고 파인플레이를 하는데 벤치에 들어가면 애들이 막 웃어요. 좀 화날 때도 있지만 그게 내 색깔이 아닌가 싶어요. 건성으로 하는 것 같으면서도 챙길 것은 확실하게 챙기는 거. 뭐 그런 거 아닐까요?”라고 설명한다.
원래 양준혁은 장타, 즉 홈런에 대한 욕심이 컸다. 하지만 선수협의회 일로 쫓아다니느라 운동을 소홀히 하면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그 결과 한때 ‘요령’을 피우는 야구로 궤도를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예전 백인천 감독이 삼성에 계실 때 절 별로 안좋아하셨어요. 그분은 제 폼을 ‘개폼’이라고 비난하셨거든요. 그분 기준에선 (이)승엽이처럼 이쁘게 야구하는 걸 좋아했어요. 저처럼 거칠고 폼도 엉성한 스타일은 인정을 못받았었죠. 아이러니한 건 그런데 그분 밑에서 성적이 좋았다는 사실이에요.”
양준혁은 외모만으로 봤을 때 ‘말술’이 제격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집안 대대로 술과는 별로 인연이 없단다. 기분 좋을 때 마시는 폭탄주의 마지노선이 일곱 잔. 폭탄주 서너 잔이면 ‘알딸딸’한 상태에서 ‘까투리 타령’이 절로 나오는 무아지경에 다다르지만 가끔은 일행들로부터 ‘안주발’ 세운다고 핀잔을 듣는 서글픈 신세가 될 때도 있단다.
▲ 환하게 웃는 양준혁의 뒤로 지난해 우승기념 사 진이 걸려 있다. | ||
“어떤 사람은 제가 승엽이한테 콤플렉스를 느낀다고 하는데 그건 전혀 실상을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라이벌 의식도 어느 정도 실력이 비슷해야 하는데 저보다 두세 수 위인 선수하고는 비교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겁니다. 전 개인적으로 승엽이한테 감사해요. 6억원대의 연봉 시대를 열면서 다른 선수들의 연봉도 자동적으로 상승되는 효과를 가져왔고 우승에 대한 한을 ‘이놈아’가 풀어줬거든요. 좋은 후배 만난 덕분에 보너스도 1억원씩 받고 정말 고마운 거예요. 그런 선수를 라이벌로 생각한다면 제가 바보인 셈이죠.”
양준혁은 과거 선수협 문제로 인해 여러 가지 피해와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FA로 풀려나며 LG와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내달렸다. 양준혁이 LG측에 자신의 몸값으로 36억원을 요구하자 양준혁을 괘씸죄로 몬 8개팀 사장단은 어느 팀에서도 양준혁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협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냥 기다리고 있다가는 야구를 못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최희섭의 에이전트인 이치훈씨한테 전화를 했죠. 메이저리그로 갈 수 있는 다리 좀 놓아달라면서. 뉴욕 메츠에서 저한테 직접 팩스를 보냈어요. 연봉 포함해서 총 1백20만달러를 제시하더군요. 마음이 흔들렸죠. 그런데 김응용 감독님이 절 잡았어요. 당시만 해도 사장과 프런트는 제가 삼성에 오면 팀 분위기 망친다며 결사 반대했다고 해요. 결국엔 김 감독의 지원에 힘입어 삼성과 마이너스 옵션 계약을 하면서까지 친정에 다시 정착하게 됐는데 지금도 제 선택에 대해선 후회하지 않아요.”
양준혁은 당시만 해도 메이저리그 진출 자체가 최고의 목표가 아닌 최후의 카드였다고 한다. 어린 선수들한테는 ‘꿈의 무대’였지만 양준혁한테는 야구 인생의 마지막 무대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나이 먹어 망가져서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다가 그냥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리면 어떡해요. 특히 프로팀 사장들이 절 죽이려는 상황에서 한국을 떠났다가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김응용 감독과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던 거죠.”
양준혁이 제일 싫어하는 질문 중 한 가지가 바로 결혼에 대한 이야기다. 이젠 대답하기도 신물이 날 만큼 닳고 닳은 주제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야구 잘하고 돈 많고 남자답게(?) 잘 생긴 이 남자가 왜 결혼을 못하는지(또는 안하는지)에 대해 여전히 궁금할 따름이다.
“2, 3년 전만 해도 좀 조급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편해요. 장가간 후배들이 하나도 안부러워요. 구속받는 느낌을 받으니까. 그래서인지 후배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요. 불러내려고 해도 처자식이 있다보니 연락을 하기가 부담스럽죠. 결혼, 물론 하긴 할 거예요. 지금 당장은 힘들고 2년 정도 더 있다가? 한 가지 밝혀둘 게 있는데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끔 오해하는 분들이 계셔서. 하하.”
‘선수협 파동’은 양준혁한테 극한 상황에서 사람의 진실이, 진심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 중에서도 선동열씨에 대한 섭섭함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물론 그분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죠. 하지만 가장 먼저 나서서 도와줄 것처럼 행동했던 분이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리니 당시 절박한 저희 입장에선 황당함을 지나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양준혁은 무엇보다 ‘가오’를 중요시한다. 한마디로 ‘폼생폼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 흔한 스캔들 한번 없이 ‘뽀다구’있게 자신의 강성 이미지를 가꿔온 그는 앞으론 ‘부드러운 남자’가 지향점이다. “왜냐구요? 어휴 이젠 저도 ‘주동자’의 이미지를 벗고 장가 좀 가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