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에는 그가 더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유명세를 그녀 에게 양보했다. 고생 끝에 그라운드로 돌아온 풍운아 손혁 은 ‘한희원(작은 사진)의 남자’라는 타이틀도 자랑스레 여길 수 있게 됐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에겐 한때 야구가 인생의 전부인 줄 ‘착각’하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마운드를 떠나 역경과 방황의 시간을 보내며 야구보다 더 소중한 게 무엇인지를 깨달은 뒤부턴 가정과 친구의 소중함을 절대적으로 꼽고 있다. 트레이드 파동으로 은퇴와 복귀를 거듭했던 탓에 ‘풍운아’란 닉네임이 꼬리표처럼 달려 있는 손혁을 지난 7월22일 잠실야구장 부근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여자친구의 우승 뒤풀이를 도맡아 하느라 이틀 동안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친구들마다 ‘한턱 내라’는 성화가 빗발치고 있어 당분간 우승 파티를 계속해야 될 것 같다고 말하는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이다. “정말 그렇게 좋냐”고 물었다.
“제가 못한 걸 희원이가 먼저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지난 연말 두 사람이 첫 우승과 첫 승리를 거두는 걸 새해 목표로 삼았는데 어려운 가운데 희원이가 그 약속을 먼저 지킨 거예요. 그러니 당연히 기분 좋죠.”
토요일(26일) 등판 예정이라 술을 조금만 하겠다며 미리 양해를 구한 그는 질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술에 관한 일화를 털어놓았다.
“술 하면 친구 중 이훈(탤런트)이 생각나요. 훈이를 알게 된 것은 (심)재학이형 때문이었어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면서 이휘재씨와 함께 훈이를 데리고 나왔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절대로 친해질 수가 없었어요. 훈이는 술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전 술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아무리 훈이가 건배를 해와도 잔만 부딪쳤지 마시질 않으니까 좀 기분이 나빴나봐요.”
첫 만남에서 별로 좋은 인상을 주고받지 못한 두 사람은 심재학의 부단한 ‘설득’을 통해 다시 만날 수 있었고 그 후론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인간성을 확인하며 상대방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훈이는 지금의 와이프랑 잠실구장을 자주 찾아왔어요. 친해진 뒤 처음으로 야구장에 왔을 때의 일인데 그 친구 입장에선 제가 등판한다니까 어떻게든 응원해주고 싶었겠죠.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훈이가 제 이름을 부르더라고요. 그런데 전 경기 전에 아는 사람을 만나면 게임을 망치는 징크스가 있었거든요. 어쩔 수 없이 훈이가 불러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죠. 훈이는 목이 터져라 제 이름을 불렀는데도 반응이 없자 자존심이 상했나봐요. 나중엔 덕아웃 있는 데까지 내려와선 제 이름을 불렀고 결국 전 아는 척할 수밖에 없었어요. 경기 결과요? 2회에 4점 주고 강판 당했어요.”
야구를 그만두고 무작정 떠난 미국으로의 여정. 새로운 삶을 모색하기 위한 ‘여행’이었는데 아무리 야구를 잊으려고 해도 자꾸 경기장으로 발걸음이 옮겨지곤 했다고 한다.
“(이)승호가 자주 전화를 걸어 ‘형, 이상하게 공이 안맞아요’라며 하소연하는 거예요. 그러면 전 “그래 그럴 땐 이렇게 해봐”하고 코치를 해줬죠. 야구를 잊으려고 미국까지 간 사람한테 야구가 안된다고 전화하는 후배나 또 경험담을 들려주며 신바람을 내는 저나 정말 어쩔 수 없는 ‘야구장이’였나 봐요. 방황하면서 마운드가 너무 그리워졌고 결국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귀국하고 말았어요.”
손혁은 귀국 전 당시 보스턴레드삭스 마이너리그에서 뛰던 선배 이상훈을 찾아갔었다. 이상훈의 집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그가 이런 메시지를 전해줬다고 한다.
“혁아, 넌 플레이트를 밟는 게 얼마나 행복한 줄 모르는 것 같다. 이걸 밟고 싶어도 능력이 안돼 2군에 가 있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왜 야구를 그만두려고 하냐? 야구에선 투수가 최고야. 다 평지인데 투수가 서 있는 곳만 높잖아.”
당시 이상훈의 충고는 손혁에게 큰 깨달음을 안겨줬다.
기아 복귀후 가장 큰 고민거리는 ‘예전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느냐’ 여부보다 ‘한번 돌아선 팬들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놓느냐’는 것이었다.
“정말 죄송했어요. 팀이 싫어서가 아니라 트레이드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속사정이 있었는데 팬들로선 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을 거예요.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공을 던지는 것만이 속죄의 방법이었어요.”
은퇴 선언후 우여곡절 끝에 다시 그라운드에 선 2001년 3월, 공식경기의 첫 상대가 공교롭게도 친정팀 LG였다. 7회 초 세 번째 투수로 나간 손혁은 첫 이닝을 가볍게 막다가 8회 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속 안타 이후 트레이드로 자신과 유니폼을 맞바꿔 입은 양준혁이 나오자 흔들림의 세기가 더욱 거세졌다. 결국 풀카운드 접전 끝에 4구를 내줬고 이후 야수의 실책까지 겹쳐 5실점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 경기가 시즌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어깨(회전근)가 끊어져 버렸거든요. 그 후 진통제를 먹고 던져보기도 했지만 8알을 먹어도 효과가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자 도저히 안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수술을 결정한 거죠.”
올 시즌 기아에서 두산으로 트레이드된 손혁은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어깨 수술 후 피나는 재활 끝에 지난 6월 마운드에 올라섰을 때의 감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운드에 서 있는데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거예요. 타자가 안타를 쳐도, 포볼로 진루를 허용해도 기분이 좋은 거예요. 다시 일어섰다는 것, 다시 타자를 상대해 공을 요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했어요.”
LG로부터 96년 신인 2차지명 1순위로 지명받아 2억3천만원의 거액을 받고 프로에 입단했을 정도로 그의 첫발은 장밋빛이었다. 98년과 99년 연속 두자릿수 승리를 거두면서 팀의 기둥투수로 커나갔다. 그러나 정작 손혁이 ‘삶의 방정식’을 새롭게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화려했던 양지의 생활 덕분이 아니라 그후 겪어야 했던 부침 많은 야구 인생을 통해서였다.
“다시 부상당하면 이젠 야구 못할 것 같아요. 지금처럼 열심히 할 자신이 없거든요. 두 번 다시 후회할 짓 하지 않으려고 엄청 뛰고 있는데 아마도 그 힘의 원천은 희원이겠죠. 올 겨울엔 좋은 소식을 알려드릴지도 모르겠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