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폐막된 전국체전 레슬링 무대는 시드니올림픽 이후 코치로 활동하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심권호(32)의 현역 복귀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심권호는 그레코로만형 55kg급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성공적인 복귀신고를 치렀지만 그의 마음 한가운데에는 최근 발생한 한 어린 레슬링 선수의 죽음이 커다란 그늘로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심권호는 일련의 사태로 인해 ‘취중토크’ 제의를 다음으로 미루다가 레슬링의 현실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심정으로 지난 16일 강남의 한 음식점에 나타났다. 96애틀랜타올림픽 그레코로만형 48kg급과 2000시드니올림픽 54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현역 선수로서 더 이상 이룰 게 없을 만큼 화려한 시절을 보냈던 심권호의 현역 복귀 사연과 체중 감량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들어봤다.
무리한 체중 감량으로 인해 죽음에까지 이른 고교 레슬링선수 김종두군(17)에 대해 심권호는 “잘 알고 있는 후배였다”고 말한다. 특히 김군과는 전국체전 동안 같은 숙소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 날도 우연히 김군의 방에 들어갔다가 김군이 쓰러져 있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었다는 것.
“눈이 풀려 있어서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죠.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누굴 원망할 수도 없는 현실이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체중 감량으로 인한 사고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예전에도 체중 조절 실패를 비관한 나머지 자살한 선수가 있었고 전도유망했던 레슬링 선수가 ‘체중과의 전쟁’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운동을 포기한 적도 많았다. 어차피 체급 종목에선 안고 가야 할 숙명이기 때문에 체중 조절 자체를 문제시할 것이 아니라 체중 감량의 방법 쪽으로 관심을 돌렸으면 하는 게 심권호의 솔직한 바람이었다.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이 필요한데도 현실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특히 어린 선수들은 자기 관리에 서툴러요. 계체량을 5일 앞두고서도 탄산음료를 부담 없이 마시니까요. 전날 다 빼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이 결국 무리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들죠.”
심권호는 경량급이라 체중 빼기가 중량급에 비해 4~5배는 더 힘들었다고 한다. 마지막 0.5kg을 남겨 놓고 눈금이 더 이상 내려가지 않을 때는 그로기 상태에 빠져 오줌 한 방울까지 다 쏟아내다가 계체량을 통과한 이후에야 겨우 미음으로 텅텅 비어 있는 속을 달랜다는 것.
“체중 감량은 노하우예요. 어린 선수들은 힘들지만 체중 조절에 구력이 쌓이다보면 어떻게 해야 잘 빠지는지 알거든요. 갑작스런 감량이 아니라 단계별로 운동량과 식사량을 조절하며 몸조리를 한다면 최소한 불행한 사태는 막을 수가 있죠.”
심권호는 ‘올림픽 스타’가 전국체전에서 은메달밖에 따지 못한 것은 불명예가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쏟아냈다.
“2년여 만에 현역 복귀를 선언한 뒤 사실 전국체전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어요. 특히 결승에서 맞붙었던 박은철(한체대 4년)이 제가 속해 있는 주택공사 입단을 앞두고 있어 굳이 전력질주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구요. 경기 전날 기권을 하려고 했다가 주위의 만류로 결국 경기에는 참가했어요. 열심히 하는 후배의 기를 꺾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어요. 하지만 아테네올림픽 예선전에서 맞붙는다면 사정은 좀 달라질 겁니다.”
심권호는 자신의 재등장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어느 체급보다도 경쟁이 치열한 그레코로만형 55kg급이라 실제로 심권호의 복귀 소식은 다양한 추측을 양산해내기도 했었다. 그중 하나가 돈을 벌려고 선수 생활을 연장했다는 지적.
“저도 그 얘길 들어봤어요. 만약 돈을 벌려고 했다면 결코 선수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코치 생활만 해도 얼마든지 편하고 여유 있게 돈을 벌 수 있거든요. 시드니올림픽 이후 여행 삼아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니 전 이미 언론에 의해 ‘은퇴한 선수’가 돼 있더라고요. 처음엔 반발도 했지만 ‘힘든 운동을 더 이상 안할 수도 있다’는 유혹에 그 즉시 반박 의사를 밝히진 못했어요. 코치로 생활하다보니 자꾸 땀 냄새가 그리워지대요. 그래서 돌아왔을 뿐이에요.”
지금은 아테네올림픽 금메달이 목표라고 한다. 올림픽 이후 선수 생활을 접을지 아니면 또 다른 목표를 가지고 릴레이 도전을 펼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알고 보니 심권호는 ‘취중토크’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왔다. 전날 선배와 술 약속이 있었지만 ‘결전의 날’을 위해 어렵게 거절한 뒤 아침부터 러닝과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몸을 다지고 숙취를 예방하는 드링크제까지 마신 뒤 인터뷰 장소에 나온 터였다.
소주 첫 잔을 ‘원샷’으로 마시기에 “상대방 기죽일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원래 선배들로부터 술을 배우길 “술은 무조건 한 번에 털어 넣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 왔기 때문이란다. 그 뒤로 심권호는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잔에 술이 채워지는 즉시 비워댔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본격적으로 심권호의 ‘라이브 립쇼’가 시작됐다. 레슬링뿐만 아니라 체육계에서 심권호의 입담을 당할 자가 없다고 소문날 만큼 그의 ‘말발’ 또한 가히 올림픽 금메달 수준이었다.
“(경기장 밖에서) 싸울 때 보면 종목별로 싸움의 형태가 다 달라요. 태권도 선수들은 싸움이 벌어지면 주로 테이블 위를 날아다녀요. 유도는 상대방을 업어치는 데 능란한 기술을 발휘하고 레슬링은 태클로 상대를 쓰러뜨리죠. 역도 선수요? 그냥 던져 버리던데요.”
몸과 몸이 밀착되는 레슬링 종목의 특성상 심권호는 수많은 외국 선수들과 맞대결을 펼치며 인종별 피부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가장 좋은 피부를 지닌 사람은 대부분 흑인이었어요. 가장 냄새나는 선수들은 주로 백인인데 그중에서도 러시아 선수들은 암내가 너무 나서 경기 진행이 힘들 정도로 괴로울 때가 많았어요. 가끔은 경기력보다 암내로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거든요.”
공식적인 신장이 160cm(실제 키는 약간 더 작다)인 심권호는 레슬링에서는 ‘제왕’ 소리를 들을 만큼 대접받고 지내지만 사회에선 키가 작아서 생긴 해프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총각인 그가 가장 괴로울 때가 여자를 소개받는 순간이다. ‘소개팅’이 있는 날은 무조건 약속장소에 30분 먼저 도착한다. 시간 개념이 철두철미해서가 아니다. 상대 여자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가서 앉아 있어야 작은 키를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유머러스한 입담으로 상대를 제압했다고 해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여자의 ‘어머나!’ 소리와 함께 “진짜 키가 작으시네요”라는 한마디가 나오면 상황은 이미 종료된 다음이다.
“나이트클럽에서 한창 춤을 추고 있는데 누가 자꾸 내 등을 건드리는 거예요. ‘누구야?’ 하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어떤 여자의 엉덩이가 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요즘 여자분들 정말 키가 너무 커요.”
‘짧고 굵게 살자!’는 심권호의 인생 철학이다. 신체조건을 따질 때 레슬링만한 천직도 없다는 심권호는 현재 키 작은 남자를 푸근히 감싸줄 수 있는 아내감을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