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어떤 달콤한 수식어보다도 ‘국민타자’라는 단어 하나에 지금까지의 이력과 평가와 이미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승엽(27·지바 롯데 마린스)과의 ‘취중토크’는 그가 왜 ‘국민타자’이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지를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일본 출국을 앞두고 훈련에 전념하기 위해 언론사와 개별 인터뷰를 일체 사양한 상태에서 어렵게 ‘취중토크’ 자리에 나온 이승엽은 원래 술과는 큰 인연이 없었지만 소주 한두 잔에도 얼마든지 유쾌하고 진솔한 면면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국민타자’라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부여하는 타이틀을 잠시 내려놓고 ‘자연인 이승엽’으로 돌아온 현장에서 그가 털어놓은 생생한 ‘야구장 밖 이야기’를 담아본다.
이미 보도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만나보니 염색한 머리보다도 반짝반짝 빛을 내는 귀고리가 눈에 띄었다. 기자의 시선이 한쪽에 고정돼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이승엽이 먼저 너스레를 떤다.
“오래 전부터 귀를 뚫고 싶었어요. 하지만 삼성에선 차마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제가 하면 다른 선수도 모두 귀를 뚫겠다고 할 것 같아 꾹 참고 있었죠. 그렇지 않아도 시선을 많이 받는 사람인데 그런 ‘일탈’로 튀는 게 싫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용병이잖아요. 일본에선 이런저런 눈치 보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거예요. 나이 들면 하고 싶어도 못하잖아요.”
어느 인터뷰에서 귀를 뚫은 이유를 두통 때문이라고 대답한 데 대해 ‘제대로’ 짚고 넘어가려 하자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설명한다.
“진짜 두통도 없어지고 기분도 맑아졌어요. 좀 더 솔직하게요? 음, 모양내고 싶은 게 ‘80’이라면 두통 해소는 한 ‘20’ 정도 될 걸요. 하하.”
염색은 그동안 표 나지 않게 하려고 브릿지를 즐겨했단다. 대구에 단골 미용실을 정해 놓고 이용하는데 서울의 미용실이 부담스러운 이유는 돈을 받지 않으려는 ‘선심 영업’ 때문이라고.
“한번은 갑자기 머리를 깎을 일이 있어서 강남에서 유명하다는 미용실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커트값이 3만원이나 하는 거예요. (5만원짜리 커트도 있다는 설명에) 어휴, 세상에나. 하여튼 머리를 자르고 3만원을 내놓으니까 안 받으시더라고요. 그냥 선물하는 거라는 말에 그럴 수 없다며 극구 사양했고 결국 ‘스타들은 50% 디스카운트해준다’고 해서 1만5천원을 내고 나온 적이 있어요.”
사소한 이야기를 나눈 김에 현재 절찬리에(?) 방영중인 모 백화점 CF에 대해 물었다. 방송을 본 소감이 어떠냐고 했더니 쑥스러워 죽겠다고 한다.
▲ 아내 이송정씨와 함께한 이승엽. | ||
술을 잘 못 마신다고 만나기 전부터 엄살을 부려 맥주를 시키려고 했더니 이왕 폼을 재려면 맥주보단 소주가 낫지 않느냐며 분위기를 잡아간다. 이승엽은 예상과는 달리 ‘말술’이었다. ‘말로 술을 다 마신다’는 뜻이다.
술자리에서 만난 이승엽의 입담은 9년간 프로야구판에서 갈고 닦은 인터뷰 실력 때문인지 아니면 형제 이상의 친분을 나눈 개그맨 김제동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달변 중의 달변이었다.
‘범생이’의 이미지를 달고 사는 그한테 운동선수로 생활하며 가장 견디기 힘든 유혹이 무엇이었냐고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유혹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요. 유혹보다도 얼굴이 알려진 공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조금 힘들었죠. 가끔은 편한 사람들과 만나 대중이 있는데서 망가져 보고도 싶고 술도 왕창 마시고 싶고 조용한 데서 사색에 잠기고도 싶은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든요. 만약 제가 술이나 담배를 피우며 유흥가를 누빈다면 ‘국민타자’ 운운하며 이상한 기사들이 다음날 아침 스포츠 신문 1면 톱으로 나올 걸요? 정말 우스운 얘긴데 가끔은 노상방뇨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니까요.”
이승엽은 지난번 진로 문제로 극심한 패닉 상태에 빠졌을 때 술에 대한 유혹이 가장 컸다고 한다. 소주 서너 병 마시고 뻗어버리면 잠시라도 고민과 갈등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체질적으로 알코올과는 인연이 없어 감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와이프도 술을 못해요. 그러다보니 집에 캔 맥주 1박스가 있으면 2년 동안 마실 정도예요. 맥주는 가볍게 한잔씩 하는데 마시는 게 아니라 거의 홀짝거리는 수준이죠. 아! 프로 입단후 ‘쎄게’ 한 번 마신 적이 있었어요. 선배들과 횟집에서 회식을 했는데 그때 잔을 돌리는 바람에 한 스무 잔을 마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혀 취하질 않았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술 따라 놓은 소주잔을 맹물인 줄 알고 단숨에 들이켰다가 호되게 고생했던 경험이 술을 가까이 하지 않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한다. 담배는 몸에 좋지 않다고 해서 배우질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 대견해 할 정도다.
한국과 일본에서 인정받은 미인 아내를 둔 ‘국민타자’의 심정은 어떨까. 혹시 아내가 너무 예뻐서 불안하거나 질투를 느껴본 적이 없는지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승엽도 아내와 관련해선 평범한 남편이자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결혼 후 복학해서 학교에 다니는데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대구에서 안성에 있는 학교(중앙대)에 갔다 오면 보통 2~3일은 걸려요. 강의를 몰아서 받으니까요. 대부분 원정경기로 집을 비우는 일정에 맞춰 강의 시간표를 짰지만 그래도 아내가 집에 없다는 생각을 하면 자꾸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아내를 믿고 대학 생활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남편이 되다보니 자꾸 이기적으로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천으로 경기가 취소됐을 때는 학교 가지 말라고 조른 적도 있어요. 같이 놀아달라고.”
이승엽은 ‘잡기’에 능하다. 술과 담배를 멀리하다보니 자연히 당구나 인터넷 게임 등과 깊은 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박명환(두산) 등과 어울려 한창 당구에 빠져 지냈을 때는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물론 시즌 종료 후의 일이지만 말이다.
박명환이 기자한테 “승엽이형의 승부욕은 알아줘야 한다. 지고는 못 가는 성격이라 밤을 새우더라도 이겨야지 게임을 끝낸다”면서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옛날 얘기예요. 지금은 일부러 져줘요. 야구에서만 이기면 되니까 이기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인터넷 게임은 원정 경기 다니면서 많이 늘었어요. 한때는 고스톱에 심취했었죠. 실제로 고스톱이나 포커를 치지 못하는데 게임은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포커에선 한 번에 1억원짜리를 터트려 난리가 났었어요. 밤 12시에 시작해서 새벽 5시까지 꼼짝 않고 한 적도 있어요. 장기는 주로 (김)제동이형을 파트너 삼아 두곤 하는데 인터넷 게임은 아는 사람이랑 하면 재미없더라고요.”
출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한국을 떠난다는 사실이 조금씩 조금씩 실감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최근 경산 볼파크에서 삼성선수들과 함께 운동했던 시간들이 너무나 재미있고 소중하다며 마음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 놓는다.
“어머니가 뇌종양으로 쓰러진 후 남들 보지 않는 데서 많이 울었어요. 편히 사실 만하니까 병이 났고 아직까지 온전한 상태로 돌아오질 않으셔서 그런 어머니를 두고 떠나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뒷바라지만 받아왔는데, 이젠 제가 그 보답을 해야 하는데… 훌쩍 떠난다는 게 효도인지, 불효인지 구분이 안 됐어요. 팬들의 질타보다도 어머니에 대한 죄송스러움이 쉽게 일본 진출을 결정짓지 못하게 했어요. 이젠 그 모든 걸 숙제로 안고 떠나요. 어머니도 말씀은 못하셔도 웃음으로 절 보내실 거예요.”
상투적인 계획이나 목표에 대한 질문은 생략하기로 했다. 지금 그 목표를 말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다. 해외 진출의 테이프를 끊는 첫 해에 좋은 성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거야 인지상정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국민타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마당에 ‘죽기살기’로 덤벼들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드릴게요. 물론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승엽의 진가와 능력은 꼭 확인시켜주고 싶어요. 그럴 만한 자신도 있고요.”
‘취중토크’라서 야구 외적인 질문을 주로 담았는데 이승엽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바른생활 사나이’의 ‘외도’를 보는 듯 흥미진진했다. 야구선수가 아니었다면 이승엽이란 이름조차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야구에 대한 사랑을 거듭 밝히던 그는 세상사람들의 넘치는 사랑에 머리 숙여 고마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부디 현해탄을 건너가서도 그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이승엽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원샷’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