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딩크 | ||
이 같은 장면은 2002년 한·일월드컵 때도 재현됐다. 히딩크 감독은 제주 훈련 때 휴일이면 유명 골프장을 찾기 바빴고, 이후 ‘스타군단’ 잉글랜드 대표팀의 마이클 오언 등 톱스타들이 휴식을 골프로 보내는 모습이 포착됐다.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이상 NBA), 마크 맥과이어(MLB), 호나우두 등 세계적인 스포츠스타의 골프관련 소식이 해외 스포츠화제로 종종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최근 스포츠기자들 사이에선 모든 종목의 취재에서 골프가 주요 화제로 등장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모든 스포츠가 골프로 통하는 시대인 셈이다. 왜 다른 종목 선수들도 너나 가리지 않고 골프채를 잡고 있는 걸까. 국내 주요 스포츠와 골프와 ‘함수 관계’를 들여다봤다.
[탁구]
‘골프 방정식’이 시작되는 종목은 의외로 탁구다. 비인기 종목에 대체로 체구도 평범한 탁구인들이 얼마나 골프를 잘 치기에 그러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절로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최근 골프를 시작해 짧은 구력에도 불구하고 80대 초반의 실력을 갖춘 탁구 국가대표팀의 유남규 코치의 말이 압권이다.
▲ 유남규(위), 선동렬 /사진합성=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탁구인들의 쇼트게임은 그야말로 ‘예술’이다. 일단 그린 근처에만 가면 웬만한 프로골퍼 못지않은 마무리 솜씨를 보여준다. 탁구인들의 스윙을 보고 거리도 별로고, 정확도도 떨어진다며 얕봤다가는 큰코 다치기 십상이다. 강문수 삼성카드 감독, 이유성 대한항공 감독, 유남규 코치 등이 ‘실력파’에 속한다.
2003년 여름 농구의 전창진 감독(원주 TG)이 강문수 감독 등 탁구인들과 국가대표 감독 골프대결을 펼쳤다가 신기의 쇼트게임에 3전 전패를 했다는 후문이 있다. 비거리가 프로를 능가한다는 전 감독이 훨씬 좋은 샷을 날리고도 그린 위에서 강 감독의 쇼트게임에 두 손을 든 것이다.
골프에서 ‘퍼팅 및 쇼트게임은 현찰’이라는 시쳇말이 있다. 이 점에서 탁구인의 골프는 내기에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야구]
야구와 골프는 닮았다. 스포츠 종목 가운데 유일하게 경기 도중에 담배를 피울 수 있고, 막대기(?)로 공을 맞히는 ‘중심이동운동’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공과 막대기의 크기와 재질, 그리고 주 공략 대상이 멈춰 있는 공이냐 날아오는 공이냐가 다른 정도다.
실제로 골프와 야구 스윙은 흡사하다. 오른손잡이일 경우 왼다리가 앞으로 밀려나지 않게 벽을 만드는 것(골프)이나 타구를 맞힐 때 몸이 앞으로 끌려나가지 않게 하는 것 등 임팩트 이론이 같다.
그만큼 야구인들은 골프를 많이 즐기고 실력도 뛰어나다. 특히 비거리는 ‘예술’이라는 찬사가 나올 정도로 엄청나다.
야구인 중 현역 최고수는 이광권 전 한화 투수코치와 기아 이상윤 수석코치가 꼽힌다. 이광권 전 코치는 2000년 티칭프로 자격증까지 딴 ‘진짜 프로골퍼’다. 컨디션이 좋으면 언더파 스코어를 내기도 한다. 이상윤 코치는 드라이브샷 비거리가 310야드를 넘어 야구인 최장타자로 알려져 있다. 쇼트게임 능력 등 정교함도 뛰어나 ‘자격증 없는 프로’로 통한다.
술, 고스톱 등 잡기에서 야구 못지 않은 국보급 실력을 갖춘 선동열 삼성 코치도 골프 얘기에서 빼 놓을 수 없다. 6언더파 66타를 쳐 비공식 야구인 최소타 기록을 갖고 있다. 이글은 수십 번 기록했고, 알바트로스(규정타수보다 3타 덜치는 신기의 기록)까지 기록한 바 있다. 선수 시절 조금씩 즐기다 일본 주니치에서 활동할 때 골프 매력에 흠뻑 빠졌고, 고우순 구옥희 등 일본에서 활약중인 한국 여자프로들과 샷 실력을 겨루기도 했다.
이밖에도 골프를 야구 대신 제2의 직업으로 택하며 골프인이 된 이들도 있다. MBC 감독대행을 지냈던 유백만 티칭프로는 현재 서문여고 골프부를 지도하고 있다. 90년대 초반 태평양의 슬러거로 활약했던 김홍기씨는 미국과 국내 세미프로 자격증을 모두 갖고 있다.
또 롯데 2루수였던 정학수씨는 지난 90년대 중반 미국으로 이민을 가 미국인들도 따기 어렵다는 PGA의 클래스A 정회원 자격증을 독학으로 따냈다. 현재 50세부터 출전이 가능한 PGA시니어투어 출전 준비를 하고 있다.
‘야구인 골퍼’와 관련해 재미있는 점은 일반 예상과는 달리 타자보다 투수 출신들의 기량이 대체로 더 뛰어나다는 사실이다. 공을 던질 때 손목을 사용하는 섬세한 운동 요령이 골프에 더 도움이 된다는 분석이다.
[농구]
한때 마이클 조던이 프로선수를 꿈꿨을 정도로 미국에서는 농구와 골프가 ‘친숙’하다. 국내 농구도 최근 2∼3년 사이 골프붐이 일었다.
예전 실업 시절에는 선수는 물론이고 지도자들도 골프는 금기시됐다. 또 지금처럼 겨울 장기 레이스가 아닌 연중 수시로 대회가 열렸기 때문에 필드에 나갈 물리적 시간도 적었다.
하지만 프로화가 되면서 감독 및 선수들의 고액연봉시대가 열렸고, 잔디가 푸릇푸릇한 여름에는 ‘에어컨리그’로 불리는 완벽한 비시즌이 있기에 국내 3대 프로스포츠 중 골프를 즐기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게 됐다. 지난해 5월에는 제1회 농구인 골프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농구인 골퍼들의 최대 특징은 야구를 능가하는 호쾌한 장타. 농구선수의 키는 작아도 180cm는 넘고 좀 크다 싶으면 190~200cm에 달한다. 당연히 스윙 궤도가 커 대부분 비거리가 뛰어나다.
농구계 최고의 장타자로 손꼽히는 김동광 삼성 감독은 300야드를 훌쩍 넘기는 장타로 유명하다. 심지어 환갑을 넘긴 김영기 KBL 총재도 아직도 거리는 웬만한 30대 주말골퍼를 능가한다. 최장타자는 야구에 뒤질지 모르지만 평균 비거리는 농구쪽이 더 낫다는 평가다.
농구인 골프대회에서 장타로 인해 벌어진 에피소드 두 가지. ‘람보슈터’ 문경은(인천 전자랜드)은 드라이버샷의 정확도가 떨어지자 대신 미들 아이언으로 남들 드라이버 거리를 내며 버디를 낚는 진기한 장면을 연출했다.
아직 초보급인 전희철도 드라이버샷이 심하게 훅이 나 티박스에서 아예 오른쪽을 보고 오조준하곤 했는데 거의 90도 가까이 꺾인 볼이 운 좋게 페어웨이 한복판에 안착했다. 비거리가 280야드 정도. 심하게 휜 걸 감안해서 쭉 폈다고 보면 300야드가 훨씬 넘는 괴력의 장타였다.
농구계의 골프지존은 제1회 대회에서 76타로 메달리스트가 된 신동찬 전 금호생명 감독, 최종규 전 TG 삼보 감독 등이 자천타천으로 거론되고 있다. 또 이충희 전 고려대 감독, 최형길 TG 삼보 단장, ‘탁구원정’에서 쓴맛을 본 전창진 감독, 장일 모비스 감독대행, 부인이 티칭프로인 강병수 KTF 코치 등의 골프실력이 아마추어 수준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부터 골프바람이 분 현역 선수들 중에서는 이상민이 짧은 시간에 싱글스코어를 육박하며 컴퓨터 같은 골프실력을 과시하고 있고, 문경은 김병철 전희철 등도 여름이면 한창 타수를 줄이고 있다. 티칭프로 자격증까지 딴 경우는 임달식 조선대 감독 등 몇 명이 있다는 후문이다.
▲ 이천수 | ||
현역 축구선수들의 골프 취미는 90년대 후반 노정윤을 필두로 한 J-리그 일본파들이 골프를 접하면서 점차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홍명보 황선홍 김도훈 등이 모두 싱글 핸디캡 실력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이천수가 스페인에서, 박지성이 네덜란드에서 외로운 이국생활을 달래기 위해 각각 골프채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파로는 신태용(성남)이 비시즌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것이 프로급 실력으로 이어졌다.
예전에는 농구와 마찬가지로 ‘선수의 자치기’는 금기시됐지만 최근 월드컵과 함께 해외 유명스타들의 골프 망중한이 알려지며 국내에서도 술 담배보다는 골프가 낫다고 용인되는 분위기다. 하긴 같은 ‘잔디 위에서 하는 운동’ 아닌가.
지도자들의 경우 프로급 실력을 갖춘 축구인이 많다. 차범근 수원 감독은 평균 스코어가 80대 초반. 독일 선수생활 때 배워 지금까지 즐기고 있다. 가정적인 성격답게 주로 부인 오은미씨와 동반 라운딩을 많이 한다는 후문이다. 조광래 안양 감독도 골프 애호가로 현역 지도자 중 골프 랭킹 1, 2위를 다투고 있다.
독특한 스윙폼으로도 언더파를 낼 정도로 실력이 탄탄한 조중연 대한축구협회 전무와 어드레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신중한 만큼 실력도 뛰어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등 축구인들은 인구 수가 많은 만큼 골프 마니아도 즐비하다. 하지만 골프와 축구의 시즌이 겹치는 탓에 야구와 농구에 비해서는 아직 대중화 속도가 더디다는 평을 받고 있다.
[기타종목]
운동원리가 비슷한 아이스하키와 테니스에도 숨은 실력자들이 상당수 있다. 아이스하키는 이재현 전 연세대 감독, 테니스에서는 김문일 전 현대해상 감독이 종목 유사성 덕에 프로급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정평이 나 있다.
이밖에 ‘국민마라토너’ 이봉주(삼성전자)도 지난해 골프에 입문했지만 강도 높은 훈련 탓에 골프를 즐기지는 못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뛰는 것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봉주는 처음 가 본 골프장에서는 티오프를 하기 전 한 30분 만에 미리 코스를 뛰어보며 코스 레이아웃을 살핀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소문도 있다.
유병철 스포츠투데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