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아차’ 싶었다. 스모 선수가 양반다리를 하고 방에 앉아 있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한눈에 김성택을 알아본 종업원이 6명이 앉는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의자 2개를 붙여줬다.
어젯밤 과음했다는 김성택은 메뉴에도 없는 김치찌개와 정종을 시켰고 식사도 일반 그릇으로 밥 한 공기만 비웠을 뿐 더 이상의 추가 주문은 하지 않았다. “연습을 하지 않으면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면서.
지난 11일 ‘한국 스모 공연’차 내한한 한국인 스모선수 김성택과 점심 약속을 겸한 ‘취중토크’ 자리에 나가면서 과연 그가 얼마나 대단한 식사량을 보여줄지 내심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이 되었다.
예상을 뒤엎는 밥 한 공기와 정종 한 잔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인간 산’과의 인터뷰 자리에는 씨름에서 스모 선수로의 처절한 변신 과정과 지금도 미화원으로 생활하는 홀어머니에 대한 애끓는 사랑, 그리고 ‘요코즈나’ 등극을 위한 쉼 없는 도전과 오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스포츠계에서 씨름선수와 농구선수한테는 주량을 묻지 말라는 통설이 있다. 사정이 그러할진대 스모 선수한테 주량에 대해 묻는 건 ‘실례’란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씨름할 때 2천cc 피처잔에 소주를 부어 원샷을 한 적이 있었어요. 정신을 잃었죠. 방울토마토를 코에 넣고 마셨는데 너무 힘들어서 그 토마토가 툭 튀어나와 피처잔에 빠졌어요. 그래도 마셨어요. 스모선수들도 술을 좋아해요. 덩치만큼 마신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헤어스타일이 특이해서 평소에도 그런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자 잠잘 때만 빼놓고는 항상 스모선수 특유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녀야 룰을 위반하지 않는 거라고 설명한다. 머리를 풀면 자신의 허리춤에 와 닿을 정도라고 하니 일본으로 건너간 뒤 6년 동안 한 번도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는 게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씨름을 시작한 건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였다고 한다. 인하대 3학년이었던 98년 대통령기장사씨름대회에서 통일장사에 오르며 아마추어 무대를 정복했지만 김성택의 진가는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프로팀의 구애를 받을 만큼 일찌감치 모래판에 알려져 있었다.
“당시 모 프로팀에서 제의한 계약금이 1억원이었어요. 월세방에 살며 어려운 시절을 보낼 때라 당연히 욕심이 났죠. 하지만 어머님이 결사반대하셨어요. 만약 그렇게 하려면 집을 나가라고까지 하며 야단이셨죠. 포기하고 대학에 진학했는데 이번엔 스모선수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문제를 놓고 어머니와 의견 충돌을 빚었어요.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수차례 설득 끝에 한국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저한테 연인이자, 연민의 대상이자, 마음의 ‘숙제’를 안겨준 분이에요.”
▲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금은 어느 정도 돈도 벌었고 어머니가 편히 사실 만한 아파트도 장만해 드렸는데 아직도 미화원으로 일하며 험한 생활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성공하기 전엔 돌아오지 않는다’고 호기 있는 장담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스모선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애초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음식은 큰 문제가 안 되었다. 스모선수들이 먹는 잔코나베(고기, 생선, 야채 등을 섞어 끓인 고단백 음식)는 처음엔 좀 먹기가 거북했지만 금세 적응했고 맛을 느낄 만큼 즐겨 먹을 수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의사소통 문제와 씨름할 때의 위계질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시무시한 내부 규율로 인해 시련기를 보낸 부분이라고 한다.
“정말 많이 맞았어요. ‘죽도’로 죽도록 맞고 살았지요. 주로 선배들이 후배들을 기합 주거나 체벌을 하는데 그때 선배한테 대들거나 표정을 찡그리면 바로 쫓겨나요. ‘얄짤’ 없어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내치는 걸 지켜보면서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오기도 생겼죠.”
일본으로 건너간 지 3년 반 만에 ‘마쿠우치’(1부리그격)로 승격되면서 스모판에 파란을 일으킨 김성택은 천하장사에 해당하는 요코즈나 등극을 앞두고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지금은 2부리그인 ‘주료’에 속해 있다.
“일본에 스모선수가 대략 1천 명 정도 돼요. 그 중에서 스모협회가 주는 월급 받고 부유하게 생활하는 선수는 70명 정도죠. 7%의 확률에서 마쿠우치에 입성하는 선수가 4%도 채 안 돼요. 그만큼 마쿠우치에 등극한다는 게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더 힘든 거죠. 2군에서 1군으로 올라가는 게 목표예요. 월급(‘주료’에선 1백만엔 정도 받는다)은 물론 대우가 정말 다르거든요. 2년 정도 후면 요코즈나에 오를 자신도 있습니다.”
김성택은 스모선수로 살아가면서 포기해야 하는 인생의 많은 부분에 대해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젊은 사람들처럼 염색도 하고 싶고 머리도 개성대로 자르고 싶고 청바지도 입고 싶어요. 훈련이 고달플 때는 이런 평범함이 더 그립더라고요. 하지만 그때뿐이에요. 정말 사소한 부분이기 때문에. 거구의 삶 자체가 평범할 수가 없는데요, 뭘. 결혼이요? 에이, 아직 멀었어요. 그래도 사랑은 하고 싶어요.”
경제적으론 불우했어도 가족간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 속에서 일본 스모계의 말로 다 표현 못할 시련들을 이겨낸 김성택은 ‘지금이 끝이 아니기에 행복하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그가 약속대로 2년 후 ‘큰일’을 저지를 수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