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그런 불안감을 안고 지난 17일 우천으로 시범경기가 취소된 가운데 대구경기장 부근의 일식집에서 김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감독실에서의 인터뷰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은 편안했고 식사보다는 술을 먼저 시켜 음료수처럼(?) 들이켰기 때문에 훨씬 더 여유로워질 수 있었다. 특히 예상을 뒤엎는 김 감독의 유머와 질문의 핵심과 분위기를 정확히 읽어내는 독심술 덕분에 참으로 오랜만에 사람 냄새 나는 인생의 대선배를 만난 기분이었다. 고집스럽고 무뚝뚝하고 냉정한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30여 년간의 덕아웃 세월을 풀어내는 ‘자서전’에는 명장 김 감독보다는 자연인 김응용이 존재할 뿐이었다.
“술? 못해. 술도 못하고 이젠 갔어. 나이가 내일 모레면 칠십인데 뭘.”
야구계에서 ‘한술’하는 감독으로 소문이 나 있던 터라 주량에 대해 물어보려고 하자 김 감독은 대뜸 ‘술을 못한다’며 엄살을 떨었다. 그러면서 기자에게 ‘술 좀 마시냐’고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종업원을 불러 백세주를 시키면서 그 전에 목 좀 축이게 맥주 두서너 병 갖다 달라는 주문을 덧붙였다. 문득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면서도 내색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우린 빨리 야구를 잊어버려야 하거든. 오늘 진 걸 밤새도록 생각하면 그 다음 경기도 망쳐. 빨리 잊으려면 잠을 자야 하잖아. 그래서 맥주에다 소주 넣어(일명 ‘소폭’) 몇 잔 마시고 자면 다음날 아주 개운해. 술 못하는 양반들이 야구 감독하면 2, 3년 만에 속병 생겨서 약을 달고 살지. 난 아직까진 괜찮아. 약은 안 먹고 밥 잘 먹고 있으니까.”
불쑥 외롭냐고 물었다. 왠지 김 감독의 얼굴에, 표정에 그런 분위기가 한가득이었다.
“내 사주팔자가 외롭고 혼자 사는 거래. 지금 사주팔자대로 살고 있는 거야. 방도 독방 쓰잖아. 유배지 생활이나 다름없지. 그런데 오늘 술이 맛있네.”
대화가 물 흐르듯이 흘러가진 않았지만 김 감독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친구들도 다 떨어져 나갔어. 감독 생활 30년 한 대가이지. 진짜로 야구 감독하면 친구 만날 여유가 없어. 감독 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달리 그런 게 아니야. 워낙 직책이 어렵다보니까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고, 그런 모습이 건방져 보인다고 오해도 많이 받지. 그래도 경조사는 챙기려고 해. 그것마저 안하면 정말 욕먹을 것 같아서.”
김 감독은 감독을 ‘괴로운 직업’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진짜 못해 먹을 일이라는 것. 만약 자신이 선수생활 할 때 프로야구가 생겨 돈을 벌었더라면 감독은 안했을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인터뷰가 끝난 뒤 김 감독과 한컷. 할 말이 없다며 그동안 인터뷰를 거절한 것과 달리 김 감독은 할 말이 많은 달변가였다. | ||
“물론 감독은 좋은 코치와 선수를 만나야 해. 그건 사실이야. 그래서 난 지금까지 내가 잘해서 우승했다고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아무리 그래도 내 칭찬하는 사람도 좀 있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웃으며) 김성근 감독은 한 번도 우승 못했잖아. 난 좋은 환경 덕분에 우승했고 올 시즌도 우승할 거라고. 지켜보라니까. 근데 왜 이렇게들 안 마셔. 다른 사람은 운전해야 한다니까 우리 둘이 마셔야겠네.”
동석자들이 차를 가져왔다는 이유로 술을 거절하자 김 감독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기자한테 연신 잔을 돌리며 술병을 비웠다. 김성근 감독 얘기가 나온 김에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 하나를 꺼내 놓았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LG와 6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을 거머쥔 후 김 감독이 소감으로 상대팀 (김성근)감독을 향해 ‘야구의 신’이라고 표현했던 것. 왜 그랬을까.
“잘 생각해 보라고. 그렇게 말해서 누가 더 올라갔냐고. ‘야구의 신’을 누가 이겼지? 하하, 내가 이겼잖아. 솔직히 (김)성근이가 (한국시리즈에)올라올 때까지 작전이 거의 맞아떨어졌어. 그래서 잘했다고 그런 거지. 작전은 뻔한 거야. 둘 중 하나라고. 선수가 그 작전에 잘 따라주면 명감독 되는 거고 안 따라주면 ‘×감독’ 되는 거고. 오늘 별 얘기 다하네. 아, 괜찮아. 다 써도 좋아.”
김 감독은 은근히 김성근 감독과의 비교를 즐겼다. 추구하는 야구 스타일과 선수단 운영 자체가 백팔십도 다른 두 감독이었지만 승부에 관한 한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감독들인 데다 연배가 비슷하고 이런저런 인연들로 얽혀 있는 친근한 관계이기 때문에 더 더욱 편하게 입에 올렸다.
“김성근 감독은 밤새 작전 구상한다고 그러잖아. 난 그런 거 안해. 5분만 생각하면 다 끝나는데 뭐. 누군 데이터 안 보고 야구하나. 모든 감독들이 기록지 분석해가며 상대팀 연구를 하는 거라고. 야구는 기록경기잖아. 솔직히 프로 감독 20년 넘게 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요즘엔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진이 다 빠졌거든. 그런데 거 사진 좀 그만 찍으라고. 늙은이 얼굴 자꾸 찍어서 뭐해.”
편한 술자리가 플래시 터지는 소리에 방해받는 게 마뜩찮은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사진기자가 요구하는 포즈에는 싫은 내색 없이 응해주는 넉넉함을 보여준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김 감독 특유의 분위기에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질문엔 아예 무응답으로 대응하다가도 중요한 이야기다 싶으면 묻지 않아도 툭툭 내뱉듯이 던지는 말들이 독특하고 인상적이었다.
“올 시즌 삼성에 마해영, 이승엽이 없다고 타력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 난 해태 시절에도 선동열, 이종범 없다고 해서 우승 못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두고 보라고. 작년에 두 사람 있을 때 삼성이 몇 위 했어? 4위라고. 오히려 올해는 그 친구들 없어도 성적이 더 좋을 거야. 물론 우승도 가능하지. 작년엔 이승엽이로 인해 행과 불행이 오락가락했어. 운동장만 나오면 모든 기자들이 승엽이한테로 몰려가는 거야. 다른 선수들 입장에선 김새는 거라고. 그런 생활을 두 달 동안 해봐. 팀워크가 어떻게 되는 건지. 결국엔 승엽이 홈런 신기록 만들어주고 삼성은 우승 욕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누구보다 이승엽을 아끼는 감독이었지만 선수의 개인 기록으로 인해 팀 전체가 희생당했던 기억들이 김 감독으로선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감독 인생이 햇수로 정확히 33년 됐다고 하니 김 감독의 은근과 끈기와 실력은 ‘1인자’라는 타이틀을 달아도 전혀 어색하거나 무리한 표현이 아니다.
“지금도 덕아웃에 들어서면 긴장이 돼. 무조건 이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거든. 관중을 위한 야구, 재미있는 야구, 스피디한 야구, 다 좋지. 하지만 이기지 않으면 아무 것도 소용없어. 가끔 원정경기차 광주에 가면 많은 분들이 반가워하셔. 예전 해태 유니폼 입고 있을 때 김응용에 대한 향수가 있어서겠지. 하지만 난 기아가 ‘적’으로 보여. 기아를 이겨야 내가 사는 거니까. 그거 알아요? 나보고 우승 많이 해서 좋겠다고 하는데 나처럼 많이 진 감독이 또 있을까. 많이 이길수록 많이 진다는 거, 지금 신임 감독들은 잘 모를 거야.”
마지막으로 선동열 코치를 김 감독의 후계자라고 점찍고 있는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건 내가 정하는 게 아니잖아. 선 코치가 믿고 밀어줄 만큼 잘하고 있어 다행이야. 물론 내 후배가 자리를 이어간다면 마음 뿌듯하겠지. 하지만 선 코치만 내 후배인가. 모든 코치들이 다 내 후배인데.”
이런 게 다 연륜의 힘일까. 핵심을 빠져가는 능력이 탁월했다.
“아, 참 이 기자. 이거 꼭 써줘야 해. 그 왜 ‘오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하며 내 흉내내는 거 있잖아. 난 한 번도 그런 말을 써본 적이 없어. 당시 코미디언들이 두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별 볼일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만들어 낸 거지 난 아니라고.”
인터뷰 후 김 감독과 기념 촬영을 했다. 팔짱까지 끼고.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멋과 매력을 자아냈다. 잘 표현하지 않는 속내에 듬뿍 담긴 정을 느꼈다면 기자가 ‘오버’한 걸까. 그의 표현대로 칠십이 내일 모레인 사람한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