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의 에이스 이재영이 지난해 10월 6일 인삼공사와의 경기에서 서브에이스를 기록하고 환호하는 모습. 연합뉴스
“다영이가 춤을 잘 추거든요. 전 춤을 별로 못 춰요. 올스타전 최다 득표를 차지하고 정작 코트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니까 아쉬운 마음에 우울해지더라고요. 나중에 기사로 다영이가 (황)택의랑 같이 춤을 췄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다영이답게 한 거죠.”
이재영 이다영의 어머니는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배구 대표팀 세터였던 김경희 씨다. 이다영이 어머니를 닮아 팀에서 세터로 활약 중이고, 이재영은 레프트를 맡고 있다. 아버지 이주형 씨는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 해머던지기 대표 출신으로 현재 익산시청 육상팀 감독이다.
팬들로부터 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이재영의 별명은 ‘표정부자’. 귀여운 외모의 그가 경기 때마다 코트에서 행하는 다양한 표정과 흥을 돋우는 제스처는 남자는 물론 여성 팬들까지 접수해버린다. 그는 인기 비결에 대해 “꾸밈없이 느끼는 대로 표출하는 행동들이 팬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간 것 같다”고 설명한다.
1월 22일 김천 도로공사전에서 왼쪽 발목이 꺾이는 부상을 당했던 이재영. 당시 2주 정도 재활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지만 그는 5라운드 첫 경기인 28일 대전 KGC인삼공사와의 경기에 선발 출전, 21득점(공격성공률 42.85%)을 올리며 승리의 수훈갑이 됐다. 부상에서 회복한 선수로 보이지 않을 만큼 그는 코트 위를 펄펄 날아다녔다.
“원래는 그렇게 빨리 복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팀이 중요한 상황에 처했는데 느슨한 마음으로 재활 운동을 해선 안되겠더라고요. 엄청난 관리를 시작했었어요. 새벽까지 얼음찜질하며 발목을 보호했고, 시간 날 때마다 발목을 제외하고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며 보강 운동에 들어갔죠. 운동 때문인지 회복 속도가 빨랐어요. KGC인삼공사와의 경기를 앞두고 감독님이 절 부르시더라고요. 시합에 뛸 수 있겠느냐고요. 전 무조건 뛰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게임 감각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코트로 돌아가고 싶었거든요. 복귀전에서 많은 득점을 올렸고, 경기 후 몸 상태를 체크했는데 크게 이상이 없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배구선수, 특히 공격수는 부상을 달고 산다. 이재영도 마찬가지. 2013년에는 무릎 연골을, 2014년에는 왼쪽 발목을, 이후 또다시 발목 부상 등이 반복되면서 체력적으로 힘든 나날의 연속이다. 그래도 코트에서 자신의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하며 팬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음을 느낄 때 그는 온몸으로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데뷔 시즌인 2015년 1월 일요신문과 인터뷰를 가진 이재영. 일요신문DB
“확실히 지난 시즌보다 코트에서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마음도 훨씬 편해졌고요. 그래서인지 이번 시즌에는 제가 하고 싶은 플레이를 많이 하고 있는 편이에요. 신인 때는 아주 힘들었어요. 모든 게 생소하고 눈치를 보게 되면서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죠. 어린 나이의 선수가 바로 주전으로 뛰거나 선발 명단에 들어가면 언니들한테 괜히 미안해지고 나도 모르게 위축이 되는 거예요. 심하게 마음 고생하다가 1년이 지나니까 조금 편해졌고, 2년 지나면서부터 그런 시선들에서 자유로워졌어요. 진짜 내 팀이고, 우리 선수들이고, 우리 감독님이 된 거죠. 이젠 밑에 후배도 들어왔어요. 저한테 선배, 또는 언니라고 부르는 후배가 생긴 거죠(웃음).”
V리그 5라운드가 시작된 현재, 흥국생명은 외국인 선수 러브와 이재영의 쌍포 공격력에 힘입어 치열한 선두권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2월 3일 현재 16승6패로 13승9패인 IBK기업은행에 승점 4점을 앞서는 중. 이재영은 우승을 바라보는 팀 성적에 힘입어 배구 하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프로 입단하면서부터 제 목표는 우승이었어요. 흥국생명에서 꼭 우승을 경험하고 싶었고, 지난 시즌에 그런 기회가 있었지만 외국인선수가 다치는 바람에 아쉽게 4위로 시즌을 마무리했거든요. 올해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고, 운도 따르는 것 같아 목표로 했던 우승을 꼭 이루고 싶어요. 바람이라면 더 이상 부상자, 이탈자 없이 시즌 마칠 때까지 이대로 쭉 갔으면 하는 거예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들 듯이 좋은 팀 성적은 선수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힘을 불어넣어준다. 이재영은 “이전과 달리 올 시즌에는 훈련 시간도 재미있고 시끌벅적하게 운동을 하기 때문에 몸이 힘들면서도 배구가 참으로 재미있다”는 소감을 전했다.
흥국생명을 상대하는 팀들은 늘 이재영을 겨냥해 서브를 날린다. 이재영의 약점으로 꼽히는 리시브 불안을 노리기 때문이다.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선수가 리시브 범실이 늘어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공격에도 영향을 미쳤고,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이재영한테 ‘리시브’는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하지만 코트에서 살아남으려면 단점을 보완해나가야만 했다. 그는 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훈련의 절반을 수비에 매달렸다고 한다.
“리우올림픽에 출전하면서 배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그중에 리시브의 중요성을 절감할 수 있었어요. 제가 (김)연경, (김)희진, (박)정아 언니보다 신장이 작아요. 작은 신장의 레프트 선수가 리시브마저 불안해지면 재앙이거든요. 최근에 코치님이 새로 오셨는데 그 코치님이 절 많이 도와주셨어요. 공격보다 수비 훈련에 집중하면서 리시브에 자신감을 갖고 임할 수 있게끔 이끌어주신 거죠. 지금은 리시브 상황이 돼도 불안한 마음이 없어요. 이전에는 저한테 공이 안 오길 바랐던 적도 있었어요.”
178cm의 이재영은 여전히 자신의 키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다. 기자와의 인터뷰 중에도 “제 키가 5cm만 더 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라고 거듭 얘기했다. 그러면서 또 한 마디. “얼마 전 같은 팀 (공)윤희 언니하고 키를 재보니까 제가 더 크더라고요. 원래 윤희 언니가 더 컸거든요. 그새 키가 자랐을까요? 제가 다영이(180cm)한테 유일하게 부러워하는 게 키예요. 키.”
이재영이 닮고 싶은 롤모델은 김연경(오른쪽)이다. 고2 때 대표팀에서 김연경을 처음 만났을 땐 너무 떨려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생애 첫 태극마크를 달았던 이재영. 당시 그가 가장 가슴 벅차했던 이유는 대표팀에서 김연경을 만난 상황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숙소 라커 문 안쪽에 포스트잇으로 ‘제2의 김연경이 되자’라고 써놨었어요. 그만큼 연경 언니는 제 우상과 같은 분이에요. 그런 분과 함께 대표팀에서 뛰고 있으니 얼마나 신기했겠어요.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연경 언니를 처음 봤는데 심장이 두근거려서 언니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어요. 언니가 장난을 쳐도 그걸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었고요.”
지금도 이재영한테 김연경은 어려운 선배이다. 그러나 여전히 닮고 싶은 선배이기도 하다.
“한때 저도 연경 언니처럼 외국 무대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프로에 와보니 그건 정말 꿈같은 일이더라고요. 그래서 꿈을 포기했는데 올림픽 앞두고 연경 언니랑 대표팀에서 훈련하며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성공 여부보다는 목표를 갖고 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이재영은 소속팀 감독인 박미희 감독에 대한 고마움, 존경심을 나타냈다. 얼마 전 박 감독이 이재영을 불러 전한 조언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감독님께서 제게 ‘이재영으로 남고 싶으냐 아니면 일반 선수들처럼 살고 싶으냐’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 건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제가 프로에서 우리 감독님을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고 축복입니다. 배구뿐만 아니라 인생의 멘토이세요. 정말 감사한 분입니다.”
‘에이스’란 수식어가 기분 좋다는 이재영. 부담조차 즐길 줄 알게 됐다는 그는 어느새 그렇게 훌쩍 성장해 있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 인터뷰 “난 여성 감독 아닌 그냥 감독” 흥국생명의 박미희 감독(54)은 1984년 LA올림픽과 1988년 서울올림픽 대표팀에서 활약하며 1980년대 한국 여자배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인공이다. 은퇴 후 지도자가 아닌 교육자의 길을 걸으며 강단에 섰고, 해설위원으로도 활약하다 2014 오프시즌에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사령탑에 올라 현재 ‘시즌3’를 치르는 중이다.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전에서 2경기 만에 패하고 시즌을 마친 후 올 시즌을 남다른 각오로 시작했다는 박미희 감독과의 짧은 인터뷰.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 ―올 시즌 흥국생명이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는 요인이 무엇인가. “위기 때마다 선수들이 잘 버텨준다. 그동안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발생했다. 가장 큰 게 선수들 부상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백업 멤버들이 역할을 잘해줬고, 주전들의 공백을 크게 느끼지 않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김)수지가 고참 역할을 잘한다. 자신의 몸 추스르기도 힘든데 세심하게 동생들을 돌본다. 고참들과 중참들, 그리고 나이 어린 선수들의 조화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팀이 선두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고 있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선수들이 부상당하면 제일 난감한 사람이 감독 아닌가. “정말 그렇다. 경기를 앞두고 세워둔 작전들이 선수 부상으로 물거품이 될 때도 많다. 감독들 사이에선 그럴 때마다 ‘돌려막기’ 한다고 표현한다. 17명의 선수들을 상황에 따라 돌릴 수밖에 없다. 부상자가 많아지면 백업 멤버들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기도 한다.” ―4대 프로 스포츠 중 유일한 여성 감독이다. “혼자만의 생각일지는 몰라도 여성 감독이 한 명이다 보니 흥국생명을 상대하는 감독들이 경기에 패하면 흥국생명에 졌다고 생각하기보단 여성 감독에게 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상대 감독들의 그 시각이 정말 힘들었다. 여자 배구인들 사이에서도 시기와 질투가 많았다. 난 그냥 감독이 된 것뿐인데 여자 배구인들도 스스로 ‘여성’이란 타이틀을 갖고 날 바라봤다. 그걸 견뎌내는 시간들이었다. 지난 시즌들은.” ―이재영이 박 감독에 대해 많은 고마움을 표현했다. 감독이 보는 선수 이재영의 모습이 궁금하다. “3년차가 되고, 올림픽처럼 큰 국제대회를 경험하면서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한 것 같다. 처음엔 서브 리시브 때문에 슬럼프를 겪기도 했고,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워낙 배구를 좋아하는 선수라 그걸 혼자 다 이겨내더라. 선수들을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냥 배구 하는 선수들이 있다. 그중에서 이재영은 코트에서 뛰는 데 희열을 느끼는 친구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유전자를 받았고, 덕분에 멘탈이 다른 선수들과 차이가 있다.” ―여자선수들을 외모로 부각시키는 부분이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선수들이 외모에 만족하고 정작 중요한 할 일을 게을리 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빛나는 외모에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굉장한 플러스 요인이 된다. 하지만 배구 선수는 미스코리아가 아니다. 코트에서 땀 흘릴 때가 제일 예뻐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재영은 상당히 괜찮은 선수이다. 귀여운 외모와 파이팅 넘치는 제스처, 코트를 뜨겁게 만드는 실력과 열정이 미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흥국생명의 우승 가능성이 부각되고 있다. “미디어데이 때도 언급했는데 난 올 시즌 우승만 보고 달리는 중이다.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절대 방심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