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 영재, 상경해 전세 대출하려다 가짜 은행원에 속아 ‘방조범’ 벌금형…손해배상까지 하며 커리어 망가져
수사 기록과 주변 사람 증언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A 씨가 보이스피싱 사건에 연루된 건 2018년이다. A 씨는 당시 서울로 상경해 전셋집을 구하려고 대출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마침 그때 A 씨는 은행 직원이라는 사람에게 연락이 온다.
은행 직원은 “A 씨는 은행 거래 기록이 없어 대출이 어렵다. 은행 거래 기록을 만들어줄 테니 그대로 따라하라”고 했다. 은행 직원은 A 씨 계좌로 돈이 입금될 테니 그 돈을 찾아서 현금을 전달하기만 하면 거래 기록이 생기게 되고 대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A 씨는 “당시 사회 경험이 전혀 없던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돈을 찾으러 은행에 갔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은 동시간대 보이스피싱 피해자 B 씨에게 연락하고 있었다. B 씨의 개인정보가 탈취됐는지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은 B 씨 상황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은 같은 시간대 B 씨에게 전화를 걸어 A 씨 이름을 대며 자신을 아무개 은행 A 과장이라고 소개했다. 조직원들이 말한 은행은 B 씨 주거래 은행이었다.
조직원들은 B 씨에게 “카드론 받은 게 있는데 은행에서 대환대출을 받는 게 좋겠다. 그러려면 카드론을 지금 당장 갚아야 한다. 내 이름으로 된 계좌로 카드론 받은 1210만 원을 넣어주면 처리하고 3500만 원을 연이율 8%로 전환해주겠다”고 말했다. B 씨는 주거래 은행에서 전화가 온 데다 카드론을 받은 상황과 금액까지 정확히 알고 있어 믿고 A 씨 계좌로 입금했다.
A 씨는 돈이 입금된 것을 보고 현금을 찾아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말한 사람에게 전달했다. 뒤늦게 B 씨는 보이스피싱인 것을 깨닫고 신고를 했지만 이미 돈은 계좌를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경찰 수사가 늦어지면서 CC(폐쇄회로)TV 등이 지워져 A 씨 외에는 아무도 잡을 수 없었다. 결국 A 씨가 모든 민사적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됐다.
수사기관은 A 씨가 ‘정상적인 대출 절차가 아닌 사실을 알고 있었고, 범죄에 연루된 금원임을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현금을 전달하는 행위가 보이스피싱 범행의 일환임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미성년자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젊은 나이에는 가혹할 수도 있는 판단이었다. 법조계에서도 “유명한 법 격언인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말이 보이스피싱 사건만큼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불이익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2019년 검찰은 A 씨를 보이스피싱 사기 범행 방조범으로 약식명령 처벌했다. A 씨는 벌금 400만 원을 납부해야 했고, 1210만 원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했다. 방조범이라도 민사소송에서는 과실에 의한 공동불법행위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범인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을 잡지 못했으니 A 씨가 소송의 주 타깃이 될 수밖에 없다.
전부는 아니지만, 꽤 많은 보이스피싱 전달책은 ‘꿀알바’라는 얘기에 한 번 혹은 두 번 일하고 책임을 뒤집어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서류 혹은 현금 한 번 전달에 10만 원’이란 문구에 혹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A 씨처럼 대출해준다는 얘기에 속아 전달하는 경우가 많아 주의를 요한다.
서초동 김 아무개 변호사는 “대부분 수사기관이 주범들을 잡지 못하니 알바라고 생각해 전달하거나 A 씨처럼 모르고 전달하는 경우 모든 책임을 다 져야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단순 전달책이라고 해도 징역형이 나올 정도로 강력하게 처벌하고 있다”고 말했다.
A 씨가 전달한 1210만 원을 두고 민사소송이 계속됐다. A 씨는 “범죄에 연루되고 소송이 계속 이어지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어졌고 연습도 안 되고 경기력도 매우 안 좋아졌다. 더군다나 보이스피싱 방조범 형사처벌 기록 때문에 출전도 막힐 위기”라고 말했다. 실제 영재로 여러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던 A 씨는 보이스피싱 범죄 연루 이후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2022년 1월 길었던 민사소송 결과 1210만 원 중 A 씨가 360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A 씨는 “얼마 전 군대를 전역해 360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일하는 중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부모님에게도 기댈 수 없어 한 달에 50만 원씩이라도 갚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B 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을 잡지 못해 A 씨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일정 부분 안타깝게 생각한다. 수사기관이 범죄조직 몸통을 잡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앞서의 김 변호사는 보이스피싱 범죄만 유독 전달책 등 단순 방조범에게 징역형까지 내리는 것을 두고 ‘국가적인 무능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회 경험이 없는 사람이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감언이설에 속아 단 한 번 알바를 한 것에 대한 처벌로는 과하다는 얘기다.
김 변호사는 “중국이나 필리핀 등과 형사사법 공조로 해결할 문제를 주부나 대학생 등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면서 “보이스피싱 범죄가 나쁜 것과 별개로 가해자라는 이유로 사실상 피해자인데도 양형기준표까지 무시하는 수준으로 처벌하는 경우가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근 김 변호사의 말처럼 단순 알바인 줄 알고 가담했다가 징역형을 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은 ‘서류 전달, 현금 전달만으로 1회 혹은 하루 최대 20만 원 알바’라는 문구를 내세워 전달책을 모집한다. 사례는 매우 많다. 지난 4월에도 4회 전달한 20대 여성이 징역형을 선고 받은 바 있다. 20대 여성은 이 기간 동안 알바비로 65만 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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