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자금 조달 비용 늘어나나?…흥국생명 “현재 자금 확충 모색 중”
최근 업계에는 태광산업이 흥국생명에 4000억 원 규모의 전환우선주에 대한 출자를 단행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지난 9일 감독당국도 이에 대한 해명 공시를 태광산업에 요구했다. 같은 날 태광산업은 ‘관련 내용을 검토한 바 있으나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공시했다.
태광산업 소액주주 측과 시민단체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발했다. 태광산업이 주주와 논의 없이 오너 일가의 개인 회사인 흥국생명에 거액 투자를 검토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었다. 특히 태광산업의 증자 검토가 오너 일가 개인회사를 돕기 위한 결정이었다면 경영진과 이사회의 배임 가능성까지 거론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흥국생명은 이호진 태광그룹 전 회장이 56.30%의 지분으로 최대주주인 회사다. 오너 일가와 특수관계자(태광그룹 계열사 포함) 지분까지 합하면 지분율은 100%다. 태광산업은 흥국생명 지분을 직접 보유하고 있지 않다. 문제제기 수위가 높아지자 태광산업은 지난 14일 전환우선주 검토를 철회한다고 공식화했다.
문제는 태광산업의 이 같은 행보가 흥국생명의 가치에 상처를 남긴 모양새가 됐다는 것이다. 흥국생명이 유사시 태광그룹 계열사에서 자금 지원을 받기 어려워졌다는 것으로 비칠 수 있어서다. 계열사 지원 가능성이 축소됐다는 점은 자본을 조달하기 위한 비용이 증가했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재 흥국생명은 자본 비율을 높이기 위해 증자가 필요한 시점인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분위기가 더욱 아쉽다. 흥국생명은 지난 11월 5600억 원(약 5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영구채)에 대한 조기상환권(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일반적으로 시장에서는 신종자본증권 발행사가 콜옵션 행사 기일인 5년째가 되면 이를 행사해 투자자에게 자금을 상환해 왔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신종자본증권을 5년 만기 채권으로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흥국생명이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본조달 시장의 우려가 고조되자 흥국생명은 신종자본증권 콜옵션을 행사하기로 입장을 선회했다. 흥국생명은 상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4000억 원의 환매조건부채권(RP)을 발행해 시중은행에 매각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보험업사 대출을 통해 마련했다.
문제는 국제회계법상 자본으로 인식되는 신종자본증권을 상환하고, 부채로 인식되는 환매조건부채권을 발행하면 재무구조가 악화된다는 점이다. 특히 금융당국 권고에 따라 보험금 지급여력 비율(RBC비율)을 150% 이상으로 맞춰야 하는데 흥국생명의 재무구조가 악화되면서 지난 9월 기준 154.4%였던 RBC비율이 기준선을 밑돌 것으로 보는 시각이 늘었다. 이에 따라 RBC비율 기준선을 상회하기 위한 흥국생명의 자본 확충이 필요하다는 경고음도 동시에 켜졌다.
흥국생명은 태광산업의 출자 검토 무산과 별개로 자본 확충을 위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태광산업이 증자 검토를 철회하기로 한 날인 지난 14일 흥국생명은 공시를 통해 제3자 배정 방식으로 2800억 원 규모의 전환우선주 발행 계획을 알렸다. 다만 전환우선주를 매입할 투자자를 확정하지 못했다.
흥국생명의 전환우선주 발행 과정에서 태광산업의 존재감이 사라지면서 자본 확충까지 험로가 예상된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재계에서 관행적으로 계열사를 지원했던 것처럼 태광산업이 계열사 지원에 나섰다가 막힌 모습”이라며 “괜히 태광산업이 증자 검토가 무산된 소식만 공식화되면서 유사시 그룹 계열사 지원이 막힌 흥국생명의 전환우선주가 발행되는 모양새가 됐다. 계열사 지원이 가능한 전환우선주의 가치보다 저평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초 흥국생명은 외부에서 자본 조달을 단행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비용 증가 요인이 부담스러운 모습이었다. 우선 이호진 전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신경 써야 한다. 이번에 흥국생명이 발행하기로 한 2800억 원 규모의 전환우선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발행 1년 뒤부터는 의결권이 있는 보통주로 전환이 가능하다. 전환우선주 1주당 보통주 1주가 발행되는 조건이다. 발행 10년 뒤에는 자동으로 보통주로 전환된다.
이번에 발행되는 전환우선주는 297만 1137주다. 이는 이호진 전 회장이 가지고 있는 764만 7981주의 38.8% 수준이다. 외부 투자자가 이번에 발행하는 전환우선주 지분을 가져가고, 현재 고발을 당해 조사가 진행 중인 이호진 전 회장에 대주주 적격성 문제가 발생하면 경영권 다툼으로 번질 수 있는 수준이다.
금융정의연대, 태광그룹바로잡기공동투쟁본부 등 7개 시민단체들은 지난 7월 티브로드 지분 매각 과정에서 2000억 원 사익편취행위 및 일감몰아주기 관련 141억 원 사익편취행위 등의 혐의로 이호진 전 회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업무상 횡령 및 배임)으로 고발했다.
만약 배임·횡령으로 이호진 전 회장의 금고형 이상의 유죄가 확정돼 금융사 대주주 적격성에 불충족 판단을 받으면 이호진 전 회장은 지분율 10%까지로 의결권이 제한될 수 있다. 외부 투자자에 배정된 전환우선주 지분보다 의결권이 적어지는 것. 이 경우 이호진 전 회장의 조카 및 친족으로 분류되는 이원준 씨(14.65%), 이동준 씨(3.68%), 이태준 씨(3.68%), 이정아 씨(1.82%), 이성아 씨(1.82%) 등이 전환우선주를 확보한 외부 투자자와 손을 잡으면 이호진 전 회장의 흥국생명 경영권을 장담할 수 없다. 이호진 전 회장의 확실한 우호지분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분은 대한화섬(10.43%), 일주학술문화재단(4.70%), 티알엔(2.9%) 등으로 이들의 지분율 총합은 이호진 전 회장의 조카 및 친족보다 낮다.
이호진 전 회장의 입장에서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전환우선주에 콜옵션 등을 부여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다만 이에 따른 자금 조달 비용이 오른다는 점은 피할 수 없다.
불투명한 지배구조도 흥국생명의 전환우선주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호진 전 회장은 지난 5월 금융당국으로부터 대주주적격성 불충족 판정을 받았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차명 주식을 허위 신고했다는 혐의로 벌금 3억 원의 약식명령을 받은 것이 그 이유였다. 현재 이호진 전 회장은 벌금형에 따라 경영 참여가 제한됐지만 금고형을 피해 의결권이 제한되지는 않았다.
물론 태광산업이 아닌 태광그룹 내부 계열사가 전환우선주 물량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비판과 마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태광그룹 내 계열사는 서로 간 지분 출자로 엮여 있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조건으로 출자하면 오너 일가 개인회사의 RBC비율을 맞추기 위해 그룹 전체의 가치를 떨어뜨린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대부분 계열사는 태광산업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다.
논란을 피하기 위해 비상장사를 동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비상장사 가운데 현금성 자산을 가지고 있는 회사는 티알엔(1249억 원) 정도다. 2800억 원이란 자금을 출자하기에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유동성이 풍부하지만 직접 지원이 부담스러운 계열사가 흥국생명의 전환우선주를 매입하려는 계열사에 지급 보증을 서는 방식으로 유동성을 간접 지원해 줄 가능성도 있다.
M&A(기업인수합병) 등에 다수 참여한 한 법조인은 “태광산업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계열사에 지급보증을 서고 해당 계열사가 전환우선주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지원할 수 있는데, 이는 외부 자금 조달 방식이 아닌 그룹 내부 계열사를 동원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으로 일종의 꼼수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법조인은 “어떤 회사라도 지분에 대한 매각 가격만 적절하다면 투자를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면서도 “흥국생명처럼 지배구조가 불투명한 비상장사에 투자금을 유치하려면 발행사인 흥국생명이 투자자에게 충분한 이익을 보장해야 투자를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 회장은 “흥국생명이 외부 자금으로 자본 확충을 단행할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그동안 태광그룹이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유지한 탓에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하는 상황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태광산업 관계자는 “전환우선주를 검토한 적은 있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확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 흥국생명 관계자는 “태광그룹 계열사가 흥국생명에 출자하는 방향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은 맞지만 현재 확정된 바 없어 이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박호민 기자 donkyi@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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