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성적 둘 다 잡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조치…권순찬 감독 “단장이 내린 오더 거부한 적 있어”
#'사퇴'로 쓰고 '경질'로 읽는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시점도 이례적이었다. '터닝 포인트'로 불리는 올스타 휴식기간도 아니고 불과 3라운드 일정을 마쳤을 뿐이다. 권순찬 감독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흥국생명에 부임한 지도자다. 고작 18경기만 치르고 팀을 떠나게 된 것이다.
사퇴 발표 당시 흥국생명은 선두 현대건설에 승점 3점 차로 뒤지는 2위를 달리고 있었다. 지난 12월 중순까지 현대건설이 철옹성 같은 모습을 보였으나 최근 흔들리며 격차가 좁혀졌다. 그 사이 흥국생명도 현대건설에 승리를 거두며 맹추격했다. 1위를 충분히 넘볼 수 있는 순위와 승점 차였다. 3위 한국도로공사와 승점 차이는 16점으로 비록 1위로 올라서지 못한다 해도 2위가 유력해 보였다. 18경기에서 흥국생명이 14승을 쌓는 동안 3위 이하 팀들은 10승을 채우지 못했다.
권순찬 감독도 이번 시즌 의욕을 보였다. 김연경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전력을 구축했다. 비록 정규리그에서 2위에 머물더라도 플레이오프에서 승부를 걸어볼 만했다. 지난 12월 27일 GS칼텍스에 미래 전력(신인 지명권)을 내주고 현재 전력(세터 이원정)을 데려왔다. 이번 시즌 우승을 향한 의지로 해석됐다. 이어진 29일 현대건설전에 이원정을 기용해 승리하며 트레이드 효과를 봤다. 새로운 세터와 첫 호흡을 맞춘 김연경은 "앞으로 호흡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흥국생명 구단이 느닷없이 감독과 결별을 발표했다. 흥국생명 구단은 지난 2일 "단장과 감독이 동시에 사퇴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사퇴'라고 했지만 사실상 '경질'로 해석된다. 당일 아침, 구단 고위층이 훈련장을 찾았고 감독에게 경질 통보가 내려졌다. 통보 직후 감독은 팀을 떠났다.
#무슨 이유로 경질했나
흥국생명 구단은 경질 소식과 함께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권순찬 감독과 헤어지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 결별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권 감독은 의욕을 보이고 있었고 선수단과 관계도 원만했다. 개인 비위 등도 없었다. 일방적인 통보와 경질이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흥국생명은 1위도 가능한 위치였다. 김연경이라는 슈퍼스타의 존재감으로 플레이오프에서 호성적도 기대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도 구단은 '방향이 부합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마치 '우승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인지 의아함을 자아냈다.
흥국생명은 흥행면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 김연경 복귀가 맞물리며 흥행가도를 달렸다. 2021년 새롭게 터를 잡은 인천 삼산체육관에 많은 관중이 몰렸다. 2022년 11월 13일 홈경기는 5800석 만원을 기록했다. 주말뿐 아니라 평일에도 많은 관중이 몰려 타팀에서 "체육관을 새로 지어서라도 김연경을 데려오고 싶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관중 동원 순위도 1위였다. 성적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있는 상황 속에서 감독 경질을 결정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왔다.
경질 소식이 전해진 이후 권순찬 감독이 직접 팀 내 상황을 밝혔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단장이 오더 내리는 것이 있었다. 내가 그걸 안 들었다"며 경질 배경을 설명했다. 구단 고위층이 선수 기용에 개입했다는 내용이었다. 권 감독은 '오더'를 거부했고 이 때문에 '높으신 분'의 눈밖에 났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배구계에서도 '리빌딩'을 원하는 구단과 '우승'을 원하는 감독의 시각차가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권 감독은 '오더' 사례를 전하며 "단장은 내가 말 안 듣는다고 위에 보고를 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권 감독이 팀을 떠나게 됨과 동시에 단장의 동반 사퇴도 전해졌다. 하지만 김여일 전 단장의 사퇴는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닌 그룹 내 '보직순환' 차원으로 전해졌다. 그는 구단 모기업인 태광산업의 다양한 보직을 거쳤다.
#'흥국이 흥국했다'
일부에선 '흥국생명이 흥국생명 (하듯이) 했다'는 평이 나온다. 구단의 팀 컬러대로, 그간의 역사를 되풀이했다는 의미다. 권순찬 감독의 전임자는 박미희 전 감독이다. 그는 구단 최초 여성 감독으로 2014년 지휘봉을 잡아 무려 8시즌간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박 감독 이전 흥국생명은 유난히 사령탑 교체가 잦은 팀이었다. 함께 1970년대 창단된 GS칼텍스가 14명, 한국도로공사가 7명의 지도자가 거쳐간 것과 달리 흥국생명은 24명(대행 포함)의 감독이 팀을 이끌었다.
특히 V리그 간판을 단 프로 출범 초기, 흥국생명의 '감독 잔혹사'는 극심했다. V리그가 창설된 2005년부터 2009-2010시즌까지 5회의 감독 교체가 이뤄졌다. 고(故) 황현주 감독은 1년도 되지 않는 기간 내 팀을 떠났다가 복귀했다. 그 이후 2008-2009시즌 재차 경질되며 당시 3명의 지도자가 한 팀을 맡기도 했다.
흥국생명은 잦은 감독 교체 이외에도 혼란스러운 팀 운영으로 지적을 받는 구단이다. 2021년을 뒤흔든 이재영·이다영 자매의 학교폭력 사건의 중심에 섰던 구단도 흥국생명이다. 구단은 학폭 사태에서 안이한 대처로 논란을 키웠다. 구단의 선수단 관리 소홀도 지적됐다. 학폭 논란의 시작이 선수단 내 불화에서 출발한 탓이다. 당시 이다영은 팀 내 불화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직간접적으로 드러냈고 연쇄적으로 학폭 관련 폭로가 터져 나온 것이다.
이후로도 논란은 이어졌다. 쌍둥이 자매는 "구단이 억지로 사과를 종용했다"고 폭로하며 대립각을 세우는가 하면, 흥국생명 구단은 이른 시점에 이들을 팀으로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여 질타를 받았다.
#감독은 소모품?
약 1년 전, V리그 여자부에서는 또 한 번 석연치 않은 감독 경질이 있어 논란이 일었다. IBK기업은행과 서남원 감독이 결별하는 과정에서 선수, 코치 등이 팀을 이탈하는 등 잡음이 나왔다.
당시 IBK기업은행 사건은 부진한 성적에서 시작된 일이지만 감독 경질 과정만큼은 이번 흥국생명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평이 나온다. 냉정한 진단 없이 구단 고위층에서 '찍어 내리는 식'으로 지도자를 경질한 모양새다. 배구계 한 인사는 "점점 구단이 지도자들을 소모품 취급을 하고 있다"며 "지난 시즌과 이번 시즌 두 사례 모두 시즌 일정의 절반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일어났다. 앞으로 지도자들에게 이런 일이 더 자주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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