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나주시의 어느 야트막한 산자락. 고요하게 내리는 눈송이를 뚫고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진다. 초보 연주자 박근옥 씨(60)가 한창 연습 중이다. 그의 옆에는 트럼펫 소리에 맞춰 노래 부르듯 하울링 하는 반려견 '사니'가 있다.
'이래도 오래 살고, 저래도 오래 살아라'라는 의미에서 '사니'라고 이름 지었다는 녀석은 근옥 씨의 귀여운 단짝이다. 인생 후반전을 현대판 선비처럼 살고 싶어서 10여 년 전에 나 홀로 귀촌을 결심했다는 근옥 씨. 수십 년 세월을 함께한 대금과 취미로 배운 붓글씨도 모자라 집을 아예 그 옛날 선비들이 쓰고 다니던 '갓' 모양으로 만들 정도다.
형설지공의 삶을 꿈꾸지만 하루 24시간을 마냥 고고하게 살 수는 없다. 사니와 더불어 또 다른 반려견 '몽이', '부꼬'까지 보살피는 식구만 셋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눈이 내리자 근옥 씨가 세 녀석 모두 데리고 마당 산책을 나섰다. 눈밭을 보고 잔뜩 신이 난 대형견 몽이와 부꼬! 두 녀석의 리드 줄을 잡은 근옥 씨는 쩔쩔매며 천천히 가자고 통사정을 한다. 한쪽에선 눈 속에 얼굴을 파묻은 자유로운 영혼 사니까지 말 그대로 대환장 파티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연히 TV에서 흘러나온 대금 소리를 듣고 반했다는 근옥 씨. 군 제대 후에 본격적으로 대금을 배우며 무대에 설 정도로 그의 대금에서는 익은 소리가 났지만 생계를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도시에서 영업을 뛰며 가족들을 부양했지만 원치 않는 삶을 살았던 탓인지 나이보다 20년은 겉늙어 보였단다.
자아를 찾기 위해 나 홀로 귀촌한 그에게 반려견은 계획에 없던 존재였다. 7년 전 지인의 친구가 래브라도 레트리버 몽이를 키워달라고 맡기면서 하루아침에 강아지 집사가 됐기 때문이다. 처음엔 배변을 치우는 것도 힘들었다는 근옥 씨에게 몽이가 단순한 반려견을 넘어 가족이 된 건 순전히 '눈빛' 때문이었다.
외출하고 돌아온 근옥 씨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몽이의 따뜻한 눈빛에서 '함께 사는 존재'임을 느꼈다고. 그리고 1년 뒤 사니를 만나고 또 1년 뒤 부꼬를 만나 함께사는 삶을 살고 있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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