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 발표된 명단에서 유 추기경은 필리핀 출신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추기경에 이어 아시아권에서 두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이는 전통적으로 유럽 중심이었던 가톨릭 교회가 아시아와 같은 신흥 신자 지역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고 있음을 시사하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이탈리아 언론에 따르면 유 추기경은 분단 국가 출신으로서 남북한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힘써온 인물이다. 그가 속한 ‘포콜라레’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평화 운동으로, 끼아라 루빅이 전쟁의 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창설했다. 이 단체는 ‘마리아 사업회’라는 공식 명칭으로 교황청에 등록된 후 전 세계로 확산됐고, 한국에는 1969년에 소개됐다.
1951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유 추기경은 1979년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고 교의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대전교구장으로 재직하며 남북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네 차례나 북한을 방문한 경험을 갖고 있다. 2021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에 임명됐고, 이듬해인 2022년에는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바티칸 내부에서는 유 추기경의 탁월한 소통 능력과 포용적 리더십, 그리고 동서양을 아우르는 국제적 감각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쌓은 인맥과 신뢰는 차기 교황 선출에서 중요한 자산이 될 전망이다.
만 73세의 유 추기경은 콘클라베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피선거권도 갖고 있다. 가톨릭 교회법상 80세 미만의 추기경들만이 교황 선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콘클라베는 현지시간 23일 저녁부터 시작된다. 80세 이하 추기경들에게 선출권이 있어 전 세계에서 추기경들이 모여 새 교황을 선출하게 된다. 과정은 비교적 신속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며, 바티칸에서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다.
콘클라베가 시작되면 추기경들은 한 방에 모두 모여 하루 두 번 투표를 실시한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바티칸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새 교황이 합의되면 하얀 연기를 통해 전 세계에 알리게 된다. 한 차례 합의에 실패하면 다시 합의를 위해 물 밑에서 협상이 오가게 되는데, 이는 작은 국제 외교전으로 볼 수 있다.
코리에레델라세라와 가디언지 등 주요 언론들이 보도한 차기 교황 유력 후보들을 살펴보면 세계 가톨릭의 다양한 목소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 출신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70)은 현재 바티칸 국무원장으로서 2013년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의 외교 책임자 역할을 해왔다. 그는 논란이 됐던 중국과의 주교 임명 협상을 주도하며 교황청의 외교적 입지를 넓힌 것으로 평가받는다.
파롤린 추기경은 세계 정세에 밝고 유연한 사고를 지닌 진보적 이상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나, 일각에서는 이런 실용주의적 접근이 신앙의 원칙을 타협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요한 바오로 1세 이후 오랜만에 ‘본토’ 이탈리아 출신 교황이 탄생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필리핀 출신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추기경(67)은 역사상 첫 아시아 출신 교황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그는 한때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성향을 이을 후계자로 강력히 거론됐으나, 최근에는 바티칸 내부에서 입지가 다소 약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타글레 추기경은 동성애자와 이혼자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비판해온 반면, 낙태 문제에 관해서는 확고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가나 출신의 피터 턱슨 추기경(76)은 수 세기 만에 흑인 교황이 탄생할 가능성을 대표한다. 그는 기후 위기와 빈곤 퇴치 같은 사회정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왔으며, 아프리카 내 과도한 반동성애 법률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보여왔다. 최근 바티칸 내부에서 상당한 지지세를 확보하고 있어 예상 외의 강력한 후보로 부상했다.
헝가리의 페테르 에르되 추기경(72)은 가톨릭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로, 전통적 교리를 중시한다. 그는 헝가리의 민족주의 성향 오르반 총리와 정치적 입장이 유사하며,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등 보수적 가치를 옹호해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노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당선 시 교회 노선의 큰 전환이 예상된다.
또 다른 이탈리아 출신인 마테오 주피 추기경(69)은 진보 성향의 대표적 인물로, 프란치스코의 유산을 이어갈 적임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특사로 활동하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 지도자들과 모두 접촉한 경험이 있어 외교적 역량도 인정받고 있다.
포르투갈 출신의 조제 톨렌티노 추기경(59)은 가장 젊은 후보 중 하나로, 오히려 너무 젊다는 점이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여성 성직자 옹호론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현대 문화와 교회 간의 소통을 강조해온 개방적 성향의 인물이다.
몰타 출신 마리오 그레크 추기경(68)은 본래 보수적 성향이었으나 프란치스코 교황 재임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변화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NGO 활동 제한에 반대하고 여성 부제 서품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등 일부 개혁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탈리아 출신 피에르바티스타 피차발라 추기경(60)은 현재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로 중동 평화에 기여해왔다. 2023년에는 하마스에 납치된 이스라엘 아이들과의 인질 교환을 자청하는 등 실질적인 평화 노력을 보여왔으며, 가자지구도 직접 방문했다. 다만 교회의 주요 논쟁적 이슈들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 있어 그의 신학적 성향은 다소 불분명하다.
기니 출신 로버트 사라 추기경(79)은 가장 보수적 성향의 후보로 꼽힌다. 그는 동성 결혼과 젠더 이데올로기에 강력히 반대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평가받아 왔다. 턱슨 추기경과 함께 흑인 교황 후보로 거론되지만, 고령이라는 한계도 존재한다.
코리에레델라세라는 이탈리아 최대 일간지일 뿐만 아니라 교황청 내부에 탄탄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어 전 세계 가톨릭계에서도 주목하는 언론이다. 교황청 주변에서는 이탈리아 언론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것도 그들이 안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교황청 내부 소식에 밝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매체에서 유 추기경의 이름을 직접 언급했다는 것은 교황청 내부의 기류나 시각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