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잇단 실수로 부정선거론자들에 활동 공간을 내어줬다. 이런 현상이 관행으로 굳어질까 우려가 크다. 당장 부정선거론자들은 막강한 자본력을 토대로 조직화를 이뤘다. 반면 선거관리에 투입된 인원들은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데도 안일한 자세를 보여 문제로 꼽힌다.

이번 대선은 사전투표가 치러진 5월 29~30일부터 여러 지역 투표소에서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이른바 '부정선거 감시단'을 자처하며 트집을 잡고 선거관리원 등에 항의하는 무리가 다수 등장했다. 이 기간 서울 구로구에선 남녀가 지역 선관위 사무실에 무단 침입하다 적발됐다. 이들은 사전투표함을 감시하기 위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사례가 경기와 충청, 경남과 부산 등지에 이르기까지 흔했다.
충북 제천 중앙동 한 사전투표소 입구에서 50대 남성이 소란을 피운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경찰에 입건됐다. 그는 투표소 앞에서 "본투표에선 지문을 안 찍는데 왜 사전투표에서만 찍느냐 부정선거 아니냐"고 소리쳤다. 제주 한림읍 한 사전투표소에서도 60대 남성이 "부정선거"를 외치며 선거사무원 등을 상대로 행패를 부리다 경찰에 붙잡혔다.
폭력도 잦았다. 경기 의왕에서는 지역 선관위 사무소 입구에서 다짜고짜 "사전투표함 접수 과정을 참관하겠다"며 무단 침입과 촬영을 시도한 남성이 있었다. 그는 선관위 직원 얼굴과 팔 등을 때리고 휴대전화도 빼앗으려다 경찰에 끌려갔다. 경찰은 사전투표 기간에만 투표소 안팎에서 벌어진 폭력·소란 행위 등으로 58명을 입건하고 2명을 구속했다. 투표 방해와 소란 등으로 접수된 신고만 135건이었다. 경찰은 "지난 20대 대선 사전투표 때보다 선거 폭력이 2.2배 늘었다"고 강조했다.
본투표 당일에도 상황은 심각했다. 6월 3일 하루에만 112에 접수된 투표 관련 신고가 793건에 달했다. 투표방해·소란 223건, 교통불편 13건, 폭행 5건 등이 포함됐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다. 이런 사태가 선거철마다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은 거대 자본에 세력화까지 이뤘다.
예컨대 부정선거론자들은 그간엔 유튜브 등에서 가짜뉴스를 공유해온 수준에 그쳤으나, 이번에는 '미국공정선거감시단 본부'(미국 선거감시단)로 부정선거 의심사례 제보처를 통일했다. 이 단체는 미 국방부와 국가안보회의 등에 몸담아온 전임 관계자들로 구성됐다. 주로 극우 인사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미국 선거감시단은 '한국보수주의연합'(KCPAC)이 지원한 단체다. 지난 5월 27일 KCPAC가 주최한 미국 선거감시단 출정 행사에서 이들 단체는 "미국은 자국 정부와 연계되지 않은 해외 여러 선거감시단 활동을 허용한다"며 "선거감시단의 한국 입국은 미국이 대한민국에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는 점을 국민들에 보여주는 상징적 조치"라고 주장했다.
KCPAC는 '애니 챈'(Annie M.H.Chan·김명혜)이란 여성이 이끄는 단체다. 1952년생 애니 챈은 하와이 호놀룰루에 사는 부호로 미국에서 대규모 부동산 개발사업도 나선 적 있는 자산가다. 국내 극우 진영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론 확산에 물심양면 지원한 '자금줄'로 알려졌다. KCPAC는 한미자유안보정책센터(KAFSP)와 한미동맹USA재단(KUAUF) 등 단체들을 산하에 두고, 미국 등 해외 극우 인사들까지 포섭하며 부정선거론을 광범위하게 퍼뜨리고 있다.

이들 단체는 이처럼 체계적 외형을 갖추며 부정선거 세력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모양새다. 실제 기자는 지난 6개월 동안 부정선거론자들의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 3곳에 참여해 왔다. 이들의 부정선거론 확산 방식은 차츰 진화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이전까진 일부 유튜버들의 부정선거 주장을 자기들끼리 공유하는 게 주를 이뤘었다. 그러나 최근엔 KCPAC나 미국 선거감시단 등에 속한 미국인들에 권위를 부여하면서 이들의 부정선거 주장을 퍼트리는 형태로 변모했다.
각 단체의 돈 흐름이 투명하지 않아 향후 얼마나 조직을 키우고 활동 반경을 넓힐지 예상하기도 어렵다. 가령 KAFSP는 기획재정부가 지정한 기부금 단체로 기부금품법 등에 따라 돈 모금과 활용실적을 누리집에 공시해야 한다. 그렇지만 비공개해 논란이 된 바 있다(관련기사 [단독] '부정선거론 대모' 애니 챈 단체들의 수상한 기부금 추적).
공교롭게도 KAFSP는 지난 2월 21일 일요신문 보도 이후 홈페이지 자체를 아예 비공개로 전환했다. 기부금 내역을 홈페이지에 공시해야 할 의무는 공익법인 회계투명성 제고와 임원의 배임·횡령 방지가 목적이다. 당연히 부실공시는 각종 의심을 낳을 수밖에 없다.

대선이 끝나고도 부정선거론자들이 모인 카카오톡 채팅방에선 "단 한 가지 부정증거만 나와도 승복하지 않는다" 등 메시지가 활발히 공유되고 있다. 이에 선관위 역시 당분간은 이들 공세에서 자유롭지 못할 전망이다. 다만 선관위 스스로 이런 상황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번 대선에서 선관위는 많은 허점을 노출했다. 이를테면 사전투표 첫날인 5월 29일 서울 강남구 대치2동 사전투표소에선 남편 신분증으로 투표용지를 발급해 대리투표를 한 선거사무원 A 씨가 적발됐다. 그는 본인 신분증으로 한 차례 더 투표하려다 덜미가 잡혔다. 줄곧 부정선거를 주장해온 무소속 황교안 당시 대선후보 측 참관인 신고로 범행이 드러났다.
이 사례는 A 씨 개인 일탈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본인이 아닌 남편 신분증으로 이미 투표를 마쳤단 점에서 선관위의 부실한 관리 체계가 드러난 셈이기 때문이다.
같은 날 서울 신촌동 사전투표소에선 관외사전투표용지가 바깥으로 유출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선거 사무원들이 투표소 안 대기 공간이 부족하단 이유로 투표용지 수령자들을 밖에서 대기시키다 발생한 일이었다. 결국 이날 선관위는 "사전투표 첫날 관리 부실이 있었다"며 "선관위로서 책임임을 통감한다"는 대국민 사과 메시지를 냈다.
하지만 불과 하루 뒤인 5월 30일 경기 김포와 부천에서 사전투표 전 점검 중 지난해 총선 투표용지가 발견돼 총체적 부실이 재확인됐다. 6월 3일 당일 투표 때도 제주 등지에서 투표관리관 사인이 누락된 투표용지들이 발견되는 등 문제는 잇따랐다.
중앙선관위는 재발 방지책 마련에 머리를 맞댈 방침이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부정선거 의혹이 나오지 않도록 나름대로 준비했지만 부족했다"며 "이번 대선 선거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살펴보고 대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대선에서 선관위는 투표지 분류기를 통과한 투표용지를 사무원들이 수개표로 다시 검토하는 과정을 추가했다. 이미 계수가 이뤄진 용지를 손으로 한 차례 더 셌다는 뜻이다.
또 '외부대응반'을 신설해 부정선거 관련 문제 제기에 사실관계를 설명할 인원도 별도 구성했다. 아울러 정당과 각종 학회가 추천한 이들이 선관위 업무 절차부터 투·개표소 운영 전반을 참관할 수 있도록 했다.

'신촌 투표용지 유출 사건'에 대해 잘 아는 한 관계자의 경우 일요신문에 "당시 이재명 후보가 신촌의 해당 투표소에 방문하며 인파가 대거 몰렸다"며 "그러면 투표용지 발급을 멈췄어야 했는데 세심한 고민 없이 계속 투표용지를 뽑고 배부한 탓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발급된 투표용지와 관외사전투표 회송용 봉투 숫자가 일치해 천만다행이었다"며 "그러지 않았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고 전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