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 최연소 입단 기록 깬 유하준과 이벤트 대결…접전 끝 조 9단 승리 “유, 천재적 전투력” 졌잘싸
[일요신문] 한국 바둑의 역사에는 무려 63년 동안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상징적인 기록이 하나 있었다. 1962년, 당시 9세 7개월의 나이로 프로의 문턱을 넘었던 ‘바둑 황제’ 조훈현 9단의 최연소 입단 기록이다. 이 철옹성 같던 기록은 60여 년이 흐른 지난해 12월 18일, 9세 6개월 12일의 기록을 세운 유하준 초단에 의해 마침내 경신되었다. 한국 바둑의 찬란한 전설과 새로운 미래를 상징하는 두 기사가 1월 30일 서울 성동구 바둑TV 스튜디오에서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1953년인 조훈현 9단은 1962년 10월 14일 입단했고, 2016년 6월 7일생 유하준은 2015년 12월 18일 입단했다. 두 기사 모두 ‘9세 입단’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관록의 ‘전신’과 패기 넘치는 ‘샛별’
이번 대국은 조훈현 9단과 유하준 초단의 나이 차이가 무려 63세라는 점만으로도 바둑계의 이목을 끌었다. 조 9단은 프로 통산 2827국을 치르고 세계대회 제패를 포함해 160회 이상의 우승을 거둔 살아있는 전설인 반면, 유 초단은 이제 막 입단해 프로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샛별이다.
대국 초반, 유하준 초단은 ‘신동’이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대담한 행마를 선보였다. 특히 좌상 전투에서 요석으로 보였던 흑 점을 가볍게 버리는 기지를 발휘하며 초반 주도권을 잡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과거 ‘전신(戰神)’이라 불리며 날카로운 공격력을 자랑했던 조훈현 9단을 상대로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유하준 초단은 “신진서 9단 같은 기사가 되는 것이 목표다. 앞으로 정말 열심히 할 테니 많이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이날 중계석에서 대국을 지켜본 박정상 9단은 유 초단의 감각에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박 9단은 “듣던 대로 독창적인 수법을 구사하여 놀랐고, 전투나 판단력 부분에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시간이 많은 만큼 경솔함과 계산적인 부분의 약점을 보완하면 세계 최고의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라고 유하준 초단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다.
바둑은 유하준의 창의적인 수법으로 초반 흑이 앞서나갔으나 중반 이후 조훈현 9단의 노련함이 발휘되며 바뀌기 시작했다. 조 9단은 유하준의 패기에 당황하지 않고 특유의 빠른 행마를 앞세워 중앙의 흑 집 모양을 효과적으로 삭감해 나갔다. 국면이 미세해진 끝내기 단계에 접어들자 조 9단의 관록은 더욱 빛났다. 유하준이 상대 미생마를 쉽게 연결해주거나 끝내기에서 조금씩 손해를 보는 사이, 조 9단은 빈틈없는 수순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결국 281수까지 가는 접전 끝에 조훈현 9단이 2집승을 거두며 프로의 매운맛을 보여줬다.
#“피나는 노력만이 초일류를 만든다”
대국이 끝난 뒤 이어진 복기를 통해 조훈현 9단은 어린 후배를 향해 따뜻한 격려와 함께 뼈 있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조 9단은 “생각보다 강하고 잘 둔다. 물러설 줄 알았는데 반격해오는 자세가 아주 좋았다”고 평가하면서도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지만, 프로의 세계는 아마추어와는 천지 차이다. 이제 세상의 시선이 집중되는 주목받는 기사가 되었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압박감을 버텨내는 것이 정말 힘들 것”이라고 현실적인 우려를 전했다. 특히 조 9단은 일류 기사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절대적인 공부량을 강조했다. 그는 “제2의 신진서가 되는 것은 오로지 본인의 노력에 달렸다. 이창호 9단이 그랬듯, 남들이 4~6시간 공부할 때 10시간, 20시간씩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정말 죽으라고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며 일인자의 길을 걷기 위한 혹독한 자기 절제를 주문했다.
조훈현 9단은 유하준 초단에게 초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혹독한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유하준 초단 역시 대선배와의 대국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낀 듯 “조훈현 사범님의 기풍이 정말 발 빠르다는 것을 직접 체감해볼 수 있어 영광이었다”며 “결과는 아쉽지만 대국 내용은 만족스럽고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대국을 치른 소감을 밝혔다. 이어 “롤모델인 신진서 사범님 같은 기사가 되는 것이 목표다. 앞으로 정말 열심히 할 테니 많이 지켜봐 달라”며 9세 소년다운 당찬 포부를 덧붙였다.
유 초단을 길러낸 한종진 9단은 “하준이가 이번 대국을 통해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기량을 더욱 갈고닦길 바란다”며 “실력뿐만 아니라 언제나 당당하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기사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거장의 조언을 가슴에 새긴 아홉 살 신동 유하준이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프로의 세계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바둑계의 시선이 모이고 있다.
[승부처 돋보기] ‘SOOPER MATCH 세대를 잇다’ 특별대국
흑 유하준 초단 백 조훈현 9단 281수 끝, 백 2집승(정선)
장면도[장면도] 천재의 편린
프로의 대국은 호선이 원칙이지만, 이벤트 대결이고 유하준이 아직 공식대국을 치르지 않았기에 정선 치수로 도전하는 방식을 취했다.
지금 좌상귀 공방이 포인트. 흑▲는 맥점. 백이 A로 잡으면 흑B, 백C, 흑D로 틀어막겠다는 의도다. 여기서 젖혀간 백1이 일종의 테스트이자 노림을 품은 수. 그런데 바로 이 장면에서 유하준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타난다.
참고도[참고도] 백의 주문
백△의 젖힘은 흑1로 끊어달라는 게 백의 주문이다. 그렇다고 A로 젖혀 패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백2·4에 흑5로 막으면 백6~12까지 양자충으로 흑을 궤멸시키는 수단이 있는 것. 자, 그렇다면 흑의 대응은?
실전진행[실전진행] “반격당해서 당황했다”
그럼에도 흑1의 단수를 선수한 다음 3으로 끊어가는 유하준. 검토실에선 “아, 걸린 것 아냐”라는 탄성이 나오는데 잠시 후 깜짝 반전이 등장한다. 백6으로 나갔을 때 흑7이 유하준이 준비한 수. 백8이면 흑 2점이 잡히지만 흑9의 축머리를 선수한 다음 11로 잡아 흑이 두터운 바둑을 만들었다.
조 9단은 국후 유하준을 두고 “생각보다 강하다고 할까, 잘 둔다고 할까. 물러설 줄 알았는데 반격당해서 당황했다”고 했는데 아마 이 장면을 염두에 둔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