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H-32의 뿌리는 러시아 카모프 설계국의 Ka-32에 있다. 국내에서는 설계국 이름을 따 ‘카모프’ 혹은 ‘까모프’ 헬기로 더 잘 알려졌으며, 나토 코드명인 ‘헬릭스’보다도 대형 산불 현장에 반복적으로 등장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Ka-32는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과 강력한 양발 동축반전 로터 구조, 높은 출력, 악천후 대응 능력을 갖춘 기종으로 평가된다. 도입 초기에는 러시아제 장비 특유의 운용·정비 난이도와 부품 수급 문제가 부각되며 평가가 엇갈리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대형 산불 진화와 재난 대응에서 지속적으로 성과를 내면서 인식은 크게 바뀌었다. 산림청과 해양경찰을 중심으로 운용이 확대됐고, 민관을 가리지 않은 추가 도입이 이어졌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Ka-32 계열 헬기를 운용하는 국가가 됐다. 공군은 2차 불곰사업을 통해 Ka-32를 도입해 ‘HH-32’로 명명하고, 이스라엘 업체를 통해 일부 개량을 거쳐 운용해 왔다.#불곰사업, 냉전 이후의 이례적 군사협력
HH-32 도입의 배경에는 ‘불곰사업’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맥락이 있다. 불곰사업은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 정부가 대한민국이 제공한 대외경제협력차관을 상환하지 못하면서, 그 일부를 무기와 군수품 등 현물로 대신 갚는 방식으로 추진된 무기 도입 사업을 지칭한다.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 정부 간의 군사기술 분야·방산 및 군수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1990년부터 시작돼 장기간 이어진 국가 차원의 협력 사업이다. 냉전 종식 직후 동서 진영 간 군사기술 교류가 제한적이던 시기에 체결된 이 협정은 국제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1차 불곰사업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진행됐다. 총 2억 1400만 달러(약 3125억 원) 규모의 경협차관 상환을 통해 T-80U 전차 33대, BMP-3 장갑차 33대, 메티스-M 대전차미사일 발사기 70문과 탄약 1250발, 이글라 휴대용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 발사기와 미사일이 도입됐다.

이를 통해 우리 군은 사상 처음으로 러시아제 최신 기갑·미사일 체계를 대량으로 운용·분석할 기회를 얻었다. 1998년 러시아 정부의 모라토리움 선언으로 차관 상환이 지연되자 2차 불곰사업이 추진됐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진행된 2차 사업의 총 규모는 5억 3400만 달러(약 7800억 원)로, 절반은 경협차관 상환, 나머지는 한국 정부의 현금 지급 방식이었다. 이 사업을 통해 T-80U 전차 2대가 추가 도입됐고, BMP-3, 메티스-M 발사기와 미사일, 무레나 공기부양정 3척, Il-103 훈련기, 그리고 Ka-32 헬기가 도입됐다. 특히 2차 도입분 BMP-3에는 열영상 장비가 장착돼 야간 교전 능력이 강화됐다. 러시아제 무기 도입은 단순한 전력 보강을 넘어, 우리 군의 전력 기획과 군사 연구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T-80U와 BMP-3를 통해 러시아식 기갑 전술과 운용 교리, 장비 철학을 직접 분석할 수 있었고, 이는 이후 육군 차기 기갑 전력 발전에 참고 자료로 활용됐다.#국산 무기 개발에도 적지 않은 영향
불곰사업을 통해 도입된 러시아 무기들은 국산 무기 개발에도 참고 자료로 활용됐다. T-80U 전차는 화생방(NBC) 방어 능력을 갖춘 러시아 주력 전차로, 내부 방사능 차폐 기능을 포함해 승무원을 방사능 낙진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설계됐다. 이는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제 전차에는 없던 개념이었다. K2 전차에는 이러한 요소를 참고해 내부 방사능 차폐 기능을 국산화해 적용했다. 이 밖에 신궁 국산 휴대용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에는 이글라에 적용된 스파이크형 항력 감쇠기를 장착해 미사일 전면에서 발생하는 항력을 30~40% 감소시켰고, 이를 통해 적외선 탐색기의 추적 능력을 대폭 향상시켰다. 탐색기 역시 이글라의 기술을 기반으로 대폭 개량해 적용했다. 다만 러시아제 무기들은 단점도 분명했다. 정비에 필요한 각종 부품 비용이 국산이나 다른 외국산 대비 높았고, 수급 역시 원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10년대 들어 퇴역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2020년대 들어 대러 경제제재가 장기화되면서 부품 수급은 더욱 어려워졌다. 여기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상황은 한층 악화됐다. 불곰사업으로 도입된 T-80U와 BMP-3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실전 배치돼 육군 제3기갑여단에서 운용됐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한때 T-80U의 가동률은 96%, BMP-3는 98%에 달할 정도로 유지 상태는 우수했다. 그러나 2021년 말 이들 장비는 국산 K1E1 전차와 K200 계열 장갑차로 교체됐고, 전투부대에서 물러나 전문대항군 부대로 이관됐다. 정부 기관에서 운용되던 Ka-32 계열 헬기들 역시 운용 유지의 어려움으로 국산 또는 외산 헬기로 대체되고 있다. 불곰사업으로 도입된 러시아 무기들은 한때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여 가능성도 거론됐으나, 한·러 방산협력협정에 포함된 제3국 이전 제한 조항과 안보적 파급 효과를 고려해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냉전 이후 국제정치의 틈새에서 태어난 불곰사업. 러시아제 무기의 도입과 운용은 우리 군에 분명한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변화하는 국제정치 환경 속에서, 그 역할은 이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김대영 군사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