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하던 조 대법원장은 3주 만에 입을 열었다. 이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나간 다음날인 9월 22일 “청와대의 재제청 요청을 정당화할 구체적인 헌법적 근거와 사유를 찾을 수 없다”며 “재제청 요청에 응할 수 없다”고 허를 찔렀다(관련기사 재재제청? 국회행? 조희대 대법원장 역습에 허 찔린 청와대, 다음 카드는…).
청와대는 “헌법과 법원조직법에 따라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며 조 대법원장을 향해 “대한민국 헌법에 위배되는 인식”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성기홍 청와대 홍보소통수석비서관은 “사법부 독립은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들이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통해 보장되는 것”이라며 “대법관을 대법원장이 마음대로 앉히는 게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조 대법원장은 이 대통령과 묘한 긴장감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지난 10월 1일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국군의날 행사에 불참하고, 대법원으로 출근했다. 통상 국군의날 행사에는 대법원장이 참석했다. 조 대법원장도 최근 2년간 행사에 참석한 바 있다. 청와대도 대법원에 이번 국군의날 행사 초대장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 측은 불참에 대해 ‘건강상의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조 대법원장이 이 대통령과의 불편한 조우를 피한 것 아니냐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여권에서는 조 대법원장에 대해 격앙된 반응이 분출했다. 김민석 민주당 대표는 “여전히 남아 있는 반민주적·반헌법적·내란적 사고”라며 “대통령과 권력다툼을 하는 것인지, 대통령과 국민을 무시하는 건지 참으로 황당할 따름”이라고 직격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조희대 탄핵’ 주장까지 다시 나왔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조 대법원장 측이 ‘서면 제청’과 ‘재제청 거부’에 법적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럼 민주당도 ‘법대로’ 나갈 수밖에 없다. 조 대법원장도 관례가 아닌 법이 정한 대로 증인 출석해 답변을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조 대법원장은 국회 법사위의 청문회 출석 요구 등에 불출석 의견서를 제출하며 피해나갔다.
이번에는 조 대법원장 역시 국감 증인에 출석할 결심을 세운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9월 22일 재제청 요청 거부와 관련한 기자들 질문에 “여러분들이 궁금한 게 많다고 들었다”며 “그런 내용들을 앞으로 국감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꼭 필요한 게 있으면 공보관을 통해서 전달 드리겠다”라고 말했다.
정치권과 법조계에선 조 대법원장의 증인 출석 시사를 놓고 다양한 반응이 나온다. 여권에선 정치적 노림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고개를 들었다.
여권 한 관계자는 “국회는 본인이 컨트롤 가능한 법정과 차원이 다르다. 증인석에 앉아 질의를 받는 순간 의원들에게 난타를 당해 정신을 못 차릴 것”이라며 “조 대법원장이 말한 ‘국감을 통한 얘기’는 인사말일 수 있다. 본인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자리를 뜨려 하면, 붙잡으려는 민주당 의원들과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모습을 연출하려는 의도도 있어 보인다”고 했다.
조 대법원장의 정계 입문 여부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는 2027년 6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앞서 여권 관계자는 “조 대법원장 입장에서는 8개월 후 본인의 거취를 생각해야 한다. 이 대통령과 민주당의 진보성향 대법관 임명을 홀로 온몸으로 막아선, 보수진영 수호자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여권 관계자는 “조 대법원장은 민주당이 본인을 탄핵해주길 기다린다는 말이 여의도에서 파다하다. 그럼 국민의힘에서 영입인재로 모셔가려고 준비 중이라고 한다”고 귀띔했다. 민주당 정부와 각을 세워 인지도를 높인 다음 정계입문과 동시에 대통령에까지 오른 윤석열 전 대통령 사례를 재현하려 한다는 시나리오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도 “조 대법원장이 대선에 나오려고 인지도 높이는 작업을 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9월 29일 YTN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에 출연해 “검찰총장 윤석열처럼 대법원장 조희대도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며 “조 대법원장의 ‘서초동 정치’는 여의도 정치를 뺨친다. 사법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신 여권은 조 대법원장 개인 비위와 사법부 병폐를 집중 공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민주당은 조 대법원장의 업무추진비 사용내역을 국감에서 집중 다룬다는 계획이다. 조 대법원장은 2023년 12월 취임한 이후 2년 9개월여 동안 총 2억 6000만여 원의 업무추진비를 썼다. 이 중 상당수가 대법원과 한남동 공관 근처의 고급 식당에서 사용됐다.
청탁금지법 기준으로 1인당 식사비용을 낮추기 위해 참석인원을 실제보다 늘려 기재한 ‘인원 부풀리기’ 의혹이 제기됐다. 조 대법원장 취임 이후 전임 대법원장에 비해 업무추진비가 30배 늘어난 사실도 확인됐다. 노경필 법원행정처장은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 참석해 “참석인원이 사실과 다르게 기재됐다”며 “수치가 잘못 기재된 부분에 대해 죄송하다”고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또한 감사원은 대법원이 법원행정처장을 포함한 대법관들에게 3년여 동안 약 13억 원의 법령상 근거 없는 현금 격려금을 부적절하게 지급했다는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법원행정처가 대법관들에게 매달 512만 원 주는 특정업무경비 외에, 2022년부터 2024년 4월 사이 재판관 격려를 이유로 대법관 12명에게 매월 평균 200만 원의 격려금을 현금으로 정기 지급하고, 이 중 일부 기간에는 월 100만~150만 원을 추가로 준 것으로 드러났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