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디로 가는가. 정말 천국이나 극락으로 가는가. 그런데 천국 혹은 극락을 아는가, 믿는가.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천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천국에서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죽지도 않는다. 그런 세상, 아는가. 알 것 같은가? 알지도 못하는 세상을 천국이라 말해놓고 안다고 착각하는 일은 알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직 그 물음이 생명력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한때 우리의 부모였고, 배우자였고, 친구였던 그들이, 그들이 떠난 자리를 채우고 있는 충격과 허기와 그리움이 비로소 우리 마음속에 묘한 길을 낸다. 익숙했던 세계가 쓸려가고 낯설기만 했던 세계, 그러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길, 죽음으로 향하는 길!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종교다. 이 의미는 뭘까? 2000년 전에 엄청난 스토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한 멋진 청년을 우상화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는 예수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다. 죽음의 십자가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죽음까지 부활로 바꾸어낸 그 힘을 보는 것이다.
오강남 선생이 번역한 책 중에 러시아 영성의 고전 ‘기도’라는 책이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꿰뚫고 있는 책이다. 여기서 순례자는 주저리주저리 기도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한 문장만을 반복, 반복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루에 3000번, 6000번, 1만 2000번 그러다가 6만 번까지.
이 기도는 바깥에서 보면 단순히 문장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소용돌이처럼 일어나는 망상을 깨는 방법이고, 번뇌를 쉬어 내 안의 내재하는 빛 혹은 각성,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궁극은 통하는 법이다. 이 기도는 “아미타불”을 부르는 불교의 염불선과 다르지 않고, 만트라를 외는 힌두교의 수행방법과 다르지 않다. 다람살라에 있는 달라이라마의 사원, 남걀 사원에 가면 사람들이 마니차를 돌리며 “옴마니밧메훔”을 계속 봉송한다. 연꽃 속에 보석이라는 뜻이지만 뜻을 알 필요가 없다. 내 안에서 울려 나온 소리의 근원에 귀를 기울이며 내게서 나온 소리를 내가 다시 듣고 또 듣는 것이다.
이렇게 귀 기울이지 않으면 마음은, 들으면 듣는 대로, 보면 보는 대로 대상을 따라간다.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생각이 꼬리를 물며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그 많은 감정들, 생각들이 일어날 때마다 일어난 이야기를 따라가지 말고, 그렇다고 없애려고 하지도 말고, 없애지 못했다고 자책하지도 말고 그대로 둔 채, 만트라를 외는 것이다. 그러면 이 행위가 생각에 생각을 더하려는 관성을 멈추며 번뇌를 쉬게 한다.
김남조 시인이 썼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기쁠 때, 슬플 때, 외로울 때, 두려울 때, 부끄러울 때, 지겨울 때, 아플 때, 우울할 때, 심심할 때 자신의 종교적 전통에 따라 만트라 문장을 반복, 반복, 반복해 보면 묘한 연금술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일들과 감정들을 소화해 갈 수 있게 되며 그럼으로써 인내의 위력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단순해진다. 알지 않는가. 단순해지는 것은 단순한 능력이 아님을.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자를 기억하라. 그들이 없다는 것을. 그대는 곧 죽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대는 아직 단순해지지 못했고, 외부로부터 상처를 받지나 않나, 하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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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