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을 둘러싼 각종 의혹들이 정권 말기를 맞아 베일을 벗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또한 라 전 회장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준 검찰 수사와 상반된 재판 결과가 도출될 경우 부실·봐주기 수사 논란이 재연되는 등 상당한 후폭풍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수사 종결로 잊히는 듯했던 ‘50억 비자금’ 사건과 맞물린 ‘라응찬 리스트’가 재부상하고 있는 내막을 들여다봤다.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라응찬 리스트’는 ‘신한은행 사태’와 관련한 재판 과정에서 재부상했다. 지난 9월 12일 신상훈 전 신한금융지주 사장과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의 횡령 사건 등에 대한 공판 과정에서 로비 정황이 담긴 USB가 증거물로 제출됐기 때문이다. 이날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서 신 전 사장의 변호인은 박 아무개 신한은행 본부장의 이동식저장장치(USB)를 공개했다. 이 USB는 검찰이 당시 업무지원팀장을 맡고 있던 박 본부장의 책상에서 압수한 것이다. 라 전 회장의 고교 후배이자 측근이었던 박 본부장은 당시 총무부에서 근무했었다.
문제는 이 USB에 ‘2010년 9월 2일자 방문대상자’라는 제목의 파일이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면담(연락) 대상자’라고 제목이 붙여진 파일에는 현 정권 실세들의 이름이 대거 포함돼 있어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이 파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당시 새누리당 의원과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임태희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원세훈 국가정보원장,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기록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윤진식 새누리당 의원과 주요 일간지 사장 2명의 이름도 기록돼 있다. 라 전 회장 측이 이들 실세들을 직접 만났거나 최소한 접촉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작성한 문건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박 본부장은 “당시 업무지원팀장(라 회장 비서 역할)으로서 파일을 작성한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하면서도 실제로 계획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고 증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라 전 회장은 금융실명제법 위반 혐의로 금융감독원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라 전 회장이 구명로비 차원에서 정관계 유력인사들의 리스트를 작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전 방위 로비를 전개했을 것이란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실제로 대검 중수부는 ‘박연차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라 전 회장의 ‘비자금 조성’ 혐의를 포착하고 2009년 4월 라 전 회장을 소환한 바 있다. 신한금융지주의 자회사인 신한캐피탈이 2006년 12월 사모펀드를 만들어 가야컨트리클럽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라 전 회장이 박연차 당시 태광실업 회장에게 “가야CC 지분 5%를 사달라”며 차명계좌를 통해 50억 원을 건넸다는 것이 ‘50억 비자금’ 사건의 골자였다.
검찰은 라 전 회장의 차명계좌를 확인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갑자기 사망하자 사건을 종결했다. 검찰은 ‘10여 년 전 회사에서 받은 상여금’이라는 라 전 회장 측의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여 금융실명제법 위반으로 불기소 처분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했다.
라 전 회장이 박 전 회장에게 전달한 50억 원이 어떻게 조성된 돈이고, 실제 돈의 용처가 무엇이었는지 등 세간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들이 사실상 덮여버린 셈이었다.
검찰 수사가 종결되자 라 전 회장은 우여곡절 끝에 2010년 3월 4번째 연임에 성공했다. 현행법 상 금융회사 임원은 ‘신용질서를 해칠 우려가 없는 사람’으로 명시돼 있기 때문에 라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계속됐다면 연임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치권은 검찰 수사를 비판하며 라 전 회장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다. 금융감독원은 라 전 회장의 금융실명제 위반 혐의를 지적하면서 2010년 8월 검찰에 수사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라 전 회장의 거취 문제가 다시 수면위로 부상하면서 결국 ‘신한사태’라는 뇌관이 폭발하기에 이른다. 2010년 9월 초 이백순 신한은행장이 당시 신상훈 신한지주 사장을 배임과 횡렴 혐의로 고소하면서 신한사태는 촉발됐다. 당시 라 회장 측이 신한지주 이사회를 열어 신 사장을 해임하겠다고 공식 발표하자 신 사장 측은 신한은행이 라 회장의 실명제법 위반 사실을 감추기 위해 관련 증거를 폐기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등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졌다.
사태가 악화되자 라 전 회장은 11월에 자진 사퇴를 결정했고, 금융실명제법 위반에 대해 금융당국으로부터 업무집행정지 3개월 상당의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 또한 신 전 사장과 이 전 행장도 사임하면서 신한그룹 경영진 3인방은 경영 일선에서 모두 불명예 퇴진하는 수모를 겪었다.
검찰은 같은 해 12월 그동안 진행해온 ‘신한은행 사태’와 관련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신 전 사장과 이 전 행장은 불구속 기소한 반면 라 전 회장은 무혐의 처리해 무성한 뒷말을 야기했다. 신 전 사장은 신한은행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투모로와 금강산랜드에 438억 원을 부당 대출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와 이희건 신한금융지주 명예회장에게 지급할 경영 자문료 15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았다. 이 전 행장은 2008년께 이 명예회장의 자문료 3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처럼 검찰 수사 종결로 일단락되는 듯했던 신한사태와 ‘50억 비자금’ 의혹 사건은 법정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특히 ‘50억 비자금’ 사건은 법정에 제출된 ‘리스트’ 명단이 공개되면서 꺼져가던 불씨가 되살아날 조짐마저 일고 있다. 실제로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검찰이 밝혀내지 못한 비자금 3억 원이 이상득 전 의원 쪽에 전달됐다는 새로운 증언이 속속 제기되는 등 사건을 둘러싼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동안 정치권과 금융권 주변에서는 라 전 회장이 현 정권 실세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해 왔고, 다양한 루트로 접촉을 강화해 왔다는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야권은 경북 출신인 라 전 회장이 현 정권 출범 후 막강 파워를 과시해 온 영포라인의 강력한 비호를 받고 있다는 의혹을 강하기 제기하기도 했다.
특히 신 전 사장은 재판 과정에서 “라 전 회장이 재임 당시 고위 임원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상득 의원,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 등과 부부 동반으로 모임을 가졌다’고 과시했다. 여러 차례 부부 동반으로 모임을 갖는 것으로 보였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권불10년’이란 옛말처럼 현 정권의 막강 비호 속에 검찰의 사정칼날을 피해왔던 라 전 회장을 둘러싼 각종 비리 의혹이 정권 말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베일을 벗기 시작한 형국이다. 과연 부실·봐주기 의혹이 끊이질 않았던 ‘50억 비자금’ 사건 및 ‘라응찬 리스트’가 치열한 재판 과정에서 그 실체를 드러낼 지 정관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
“친구, 우리 다시 날 수 있을까”
세 사람은 사업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우선 라 전 회장과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특별한 관계다. 두 사람이 공개적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2006년 12월 신한캐피탈이 경남 진해에 위치한 골프장 가야CC를 운영하고 있는 가야개발 지분 75%를 획득해 경영권을 인수하면서부터다. 신한캐피탈이 선임한 가야개발 이사진에 박 전 회장의 ‘자금 관리인’으로 알려진 정승영 씨가 정산개발 사장으로 선임됐기 때문이다.
정산개발은 박 전 회장(10%)과 박 전 회장의 아들(90%)이 지분 100%를 갖고 있는 사실상 박 전 회장 개인회사였다. 정 씨는 태광실업이 인수한 휴켐스의 대표이사를 맡았을 만큼 박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정 씨가 가야개발의 이사로 선임되자 ‘가야개발의 실제 소유주는 박연차’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골프장 운영 경험이 전무했던 신한 측이 갑작스레 골프장 인수에 나서게 된 것도 박 전 회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 또한 신한금융지주가 지난 정권 때 대형 인수·합병에 성공하면서 ‘금융 빅3’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배경에도 박 전 회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란 의구심이 증폭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학 동기이자 절친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도 이 사업에 관여했다. 정산개발은 비상장 업체인 세중게임박스(현 세중아이앤씨) 지분 2.09%를 보유하고 있었다. 세중게임박스는 천 회장과 그 일가가 사실상 지배(지분 45.51%)하고 있는 회사다.
그런데 박 전 회장이 세중게임박스 지분을 매입한 배경이 석연치 않다. 지난 2006년 말 정산개발이 지분을 매입할 당시 세중게임박스는 17억 원의 손실을 기록할 정도로 실적이 악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박 전 회장은 지분 2.09%를 7억 원에 사들였다.
박 전 회장과 천 회장은 지분 거래 이전부터 두터운 친분을 쌓아왔다. 천 회장은 두 살 터울인 동생이 갑자기 죽자 동생의 친구였던 박 전 회장과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박 전 회장은 천 회장이 레슬링협회의 회장을 맡았을 때 부회장을 역임했고, 천 회장은 박 전 회장이 인수한 휴켐스의 사외이사로 선임되기도 했다.
이처럼 두터운 친분과 사업적 관계로 얽혀 있는 세 사람은 현 정권 출범 후 검찰에 구속되거나 각종 범죄 혐의로 수사를 받는 동병상련의 처지가 됐다.
현 정권 최대 사건인 ‘박연차 게이트’의 주역인 박 전 회장은 뇌물공여 및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12월 서울고법에서 징역 2년 6월 벌금 291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법원 상고를 포기해 형이 확정된 박 전 회장은 현재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천 회장은 세무조사 무마, 금융기관 대출 알선 대가로 대우조선해양 협력사인 임천공업 이수우 대표로부터 47억여 원을 수수한 혐의로 지난 2010년 구속기소됐다. 서울고등법원은 천 회장에게 징역 2년에 추징금 32억여 원을 선고했지만 대법원이 지난 6월 알선수재액과 추징액 계산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사건을 파기환송, 재판이 진행 중이다. 천 회장은 2심 재판 중 구속집행이 정지돼 현재 삼성서울병원에서 입원치료 중이다.
라 전 회장은 그동안 비자금 조성 및 실명제법 위반 혐의로 몇 차례 수사 대상에 올랐지만 번번이 검찰 칼날을 피하고 있다. 하지만 ‘신한은행 사태’ 관련 재판 과정에서 새로운 증거와 증언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잠 못이루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특히 ‘당선 축하금’ 의혹을 받고 있는 3억 원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라 전 회장이 법정 증인으로 채택될 가능성도 열려 있는 상황이다. 이 경우 ‘신한지주 빅3’가 나란히 법정에 서는 진풍경이 연출될 것으로 보인다. [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