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특별법은 여야가 보조금 지급 등에 대해선 합의했지만 연구개발(R&D) 인력의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을 놓고서는 대립하면서 2월 17일 상임위원회 통과가 불발되기도 했다. 해당 법안의 소관 상임위는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로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다. 민주당은 합의된 내용만이라도 패스트트랙으로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법안은 180일이 지나면 자동으로 상임위를 통과해 정청래 민주당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법제사법위원회로 넘어간다. 이와 관련,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반도체 산업 특성을 무시한 무책임한 처사”라며 “근무 시간의 탄력적 운용은 산업계의 지속적인 요구 사안이다. 연구자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유연한 근무 환경이야말로 우리 반도체 산업이 재도약할 토대”라고 주장했다.
반도체는 인공지능(AI) 등 미래 신산업의 핵심 요소로,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 그런데 국내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삼성전자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매출 300조 800억 원, 영업이익 32조 7300억 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성장했지만, 2개 분기 연속 시장 기대에 못 미치는 실적을 냈다. 삼성전자가 이례적으로 반도체 부문이 시장 기대에 못 미치는 실적을 냈다며 주주들에게 사과하고, 잠정 실적 발표를 하면서 해설 자료까지 공개하기도 했다.
지난 2월 27일 반도체 기업의 시설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을 강화하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국회 통과됐다. 다만 미국, 일본, 중국, 대만 등 주요 경쟁국들이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통해 자국 내 반도체 산업을 적극 지원하는 반면, 국내는 여전히 세액공제 등 간접 지원에 그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다 실효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지난해부터 반도체특별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특히 중국 등이 가파르게 추격 중인 상황에서 반도체특별법에 근로기준법 상의 주 52시간제를 예외 적용할지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됐다. 반도체 산업계 내부에서는 주요 경쟁국 비교해 규제를 완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삼성전자는 대만 반도체 업체인 TSMC의 경우 주 70~80시간 근무가 일상화돼 있기 때문에 국내도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대만도 우리와 동일한 주 52시간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TSMC의 근로행태는 대만 노동기준법상 불법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국내 반도체 기술 기초역량이 전반적으로 중국에 뒤처지고 있다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도 나왔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2월 23일 발간한 ‘3대 게임체인저 분야 기술수준 심층분석’에 따르면 고집적·저항기반 메모리, 고성능·저전력 AI 반도체, 전력반도체, 차세대 고성능 센싱 기술 모두 중국이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기술은 반도체 첨단 패키징 기술에서만 간신히 중국과 동등한 평가를 받았다. 2022년 기술수준평가 당시와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결과로, 2년 만에 국내 반도체 기술 경쟁력이 급격히 약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엄재철 반도체 산업구조 선진화 연구회 정책부회장은 “생산직이나 단순사무직 업무와 달리 R&D는 문제점 해결을 위한 문턱을 넘지 못하면 원점으로 돌아와서 다시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 결과가 제대로 안 나오는데 일하다 말고 시간 됐다고 퇴근하는 건 말이 안 된다”라며 “장애물을 넘기 위해서는 집중 근무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주 52시간 예외 적용이 필요하고 생산직이나 사무직 같은 경우도 상황에 따라 예외 적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반면 주 52시간제로도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SK하이닉스가 현행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 지난해 역대 최대 규모의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급증으로 매출 66조 1930억 원, 영업이익 23조 4673억 원의 실적을 기록했다. 지난 2월 27일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세계 D램 시장 1위 자리를 유지한 가운데 SK하이닉스가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의 출하량 증가로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빠르게 좁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경쟁력이 약화한 이유는 주 52시간제 때문이 아니라 경영진의 ‘판단 미스’ 때문이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019년 삼성전자는 HBM연구개발팀의 해체를 결정했고 SK하이닉스는 꾸준한 연구개발과 투자를 이어갔다. 경영진의 결정이 지금의 격차를 만들어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판단을 잘못해서 HBM메모리 양산을 안 했다. 그 사이 연구개발하던 인력들이 SK로 옮겨가면서 경쟁력을 상실했다”라며 “지금 빚어지고 있는 여러 이슈들의 주원인은 경영진의 능력 부재다. 사실 52시간제가 왜 부각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지적했다.
R&D 인력만 주 52시간제를 예외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주장도 나온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반도체 공정의 경우 하나의 디바이스와 관련해 700~800개에 달하는 공정을 거쳐야 하고 모든 공정에 대해 테스트를 하고 피드백을 받아서 설계도 다시 해야 한다. R&D인력 혼자서 연구를 진행하는 게 아니라 서포터들과 장비 엔지니어, 오퍼레이터들이 다 붙어서 협력해야 하고 외부 협력업체 직원들도 있는데 어떻게 일부 직군만 주 52시간제를 예외 적용하겠다는 것이냐”라며 “R&D 직군에 한정해 주 52시간제를 풀었다가 제반 노동환경이 다 악화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반도체 업계 요구에 따라 R&D 직군에 한정해 2021년 도입한 ‘3개월 단위 선택근로제’는 정작 현장에서 활용이 거의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3개월 단위 선택근로제는 3개월 평균 주 52시간을 준수하면서 근로일 간 11시간 연속휴식을 보장하면 주 최대 80.5시간까지 일할 수 있는 제도다. 김영문 화섬식품노조 SK하이닉스기술사무직지회 수석부지회장은 “현행 근로기준법으로도 충분히 일할 수 있다. 그런데 11시간의 휴식을 보장해주기 부담스럽고 이 제도를 활용하는 절차가 길고 복잡하니까 풀어달라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과 일본의 고도 프로페셔널을 벤치마킹해 주 52시간제 적용을 예외해줘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반박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은 관리직, 운영직, 전문직, 고액임금근로자 등과 관련해 최저임금과 최장근로시간의 적용을 면제받는 자를 뜻한다. 일본의 고도 프로페셔널 역시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일정한 연수입 요건을 충족하는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근로시간, 휴게, 휴일 및 심야 할증임금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 제도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사용자의 ‘업무 지시’가 없어 노동자가 재량으로 근무 시간을 늘릴 수 있다. 일본의 경우 노동자의 건강권 보장과 관련해 법적으로 명확하게 규정해 안전망을 마련했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23년에 낸 논문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과 일본의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전문직, 고액연봉자 근로시간 규제 적용 제외와 관련하여-’에서 “한국형 제도를 도입할 경우 대상 업무와 연수입 요건과 관련해 명확한 기준이 설정돼야 하고 대상근로자의 건강권 확보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김영문 수석부지회장은 “발의된 법안들을 보면 노동시간 유연화를 어떻게 한다는 건지 기본적인 내용은 전혀 규정하지 않았다”라며 “예전처럼 밤새서 보고 자료 만들 필요도 없고 전산 시스템이 다 갖춰져 있어서 엔지니어들이 매크로만 돌려놓으면 다음날 출근했을 때 데이터가 다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강제로 노동 시간을 늘려버리면 지금 같은 MZ세대는 다 퇴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종환 교수도 “직원들을 갈아넣어서 성과를 내는 구조를 만들게 되면 직원들은 외부 유혹에 훨씬 취약해진다. 섣부른 노동 유연화가 ‘자충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해져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