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택보증기금(HUG) 상습 채무불이행 목록 조회에 따르면 정 씨는 2024년 6월 30일 기준 164억 8610만 원의 임차보증금 반환채무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구상채무는 약 172억 859만 원으로 더 늘어났다. 전세사기로 고소된 이후에도 정 씨는 건물을 통해 수익을 얻었다.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아 건물이 경매로 넘어간 상황에서도 자신이 소유한 빌라를 단기 월세로 내놓은 것이다.
정 씨에게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은 대부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계약 당시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한 피해자 일부와 정 씨가 소유한 건물 가운데 그나마 신축으로 꼽히는 건물 일부가 경매에서 팔리려 해당 건물 입주민 몇몇이 보증금 중 일부를 돌려받은 것이 전부다. 정 씨의 건물에 단기월세로 들어간 피해자들은 경매 이후 집에서 내쫓기는 것은 물론 보증금도 되돌려 받지 못했다.
피해자들은 지난 8월까지 정 씨에게 직접 연락해 “피해 보상을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너 같은 놈에게 줄 돈 없다” “고소해봐라. 달라지는 게 있나”라는 답변이 돌아오거나 연락을 아예 피했다고 한다.
정 씨는 2024년 10월께 1명의 피해자에게 고소당했다. 재판부는 “피해금액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2년 6월의 징역형에 4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피해자들은 정 씨의 죄질에 비해 형량이 낮게 나왔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 1월께 또 다른 피해자 10명이 모여 정 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가 늘고 피해 금액도 18억 원으로 증가했지만 정 씨는 이번에도 징역 3년형에 그쳤다. 재판부는 “정 씨가 피해자 1명과 합의를 했으며 1개의 건물이 경매 진행 중이라 피해자의 피해 회복이 가능해 보인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10명의 피해자 가운데 단 1명과 합의한 부분이 감형 요인이 된 셈이다.
검찰 항소로 현재 항소심 재판부는 두 재판을 병합해 심리 중이다. ‘일요신문i’와 만난 피해자 A 씨는 “피해자들은 피해회복도 중요하지만 정 씨가 엄벌을 받길 원하고 있다”며 “수많은 피해자 중 단 한 명과 합의했을 뿐인데 1심 재판부가 감형을 해 어이없다”며 “항소심에서는 전체 피해 규모를 보고 판단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씨는 항소심에서도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일요신문i’ 취재에 따르면 정 씨는 최근 진행된 항소심 변론기일에서 반성문을 제출하며 변호사 의견서를 통해 “피해자와 합의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피해자 B 씨는 “저에게도 수사관이 ‘(가해자가) 피해자들과 합의를 하고 싶어한다’며 제 연락처를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정작 연락해서는 ‘너에게 줄 돈 없다’고 말했다”며 “수사기관에서는 합의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실제로는 합의할 생각이 없는 것이며 재판에서 ‘피해자와 합의했다’면서 감형을 노리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서초동의 한 부동산 전문 변호사는 “통상 전세사기 관련 재판에서 재판부는 피해자의 피해회복과 피해자들과 합의 의사를 중요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며 “단 한 명이라도 합의를 하면 재판부가 합의 의사를 보였다고 여겨 감형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해자들이 잘 알고 피해자 일부와 합의를 시도하는 편”이라고 꼬집었다.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합의했다는 '합의서'의 진위조차 의심스러워 해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된 합의서가 있는지 확인 중이다. 합의서가 없거나 합의서의 서명이 위조된 것이라면 재판부에 엄벌탄원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한편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피해자 100여 명이 경찰에 정 씨를 추가 고소했다. 법조계에서는 해당 사건과 관련해 추가 기소될 경우 정 씨는 중형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이른바 ‘빌라왕’ 등 대대적으로 전세사기를 벌인 이들은 재판이 진행되면서 추가된 기소건으로 중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김철준 기자 cj5121@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