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얼마 전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고 해서 다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들었다. 줄거리는 그대로였는데 왜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영혼을 본 느낌이었을까. 내가 달라진 것이다. 마치 젊은 날 전쟁터에서 헤어진 친구를 황혼녘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진가를 알아보고 환대하는 느낌! 고전엔 그런 힘이 있다. 나는 미친 듯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모두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남긴 재산을 놓고 아버지와 상속 분쟁을 했던 첫째아들, 드미트리가 다시 보였다. 아버지가 욕망한 여인을 사랑해서 질투에도 눈이 먼 그는 여기저기에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떠들고 다닌다. 아버지 살인범으로 몰린 그는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억울함과 분노로 날뛸 만한데 그런데 그가 바뀐다.
감옥에서, 법정에서, 유배 길에서 아버지를 닮은 불같은 성격은 차분해지며 운명처럼 다가온 누명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가 저주받은 가문 때문에, 젊은 날의 열정 때문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엔 정화가 있었다.
다시 고전 읽기의 바람이 불고 있단다. 우연히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오랜만에 손석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코너 이름도 ‘오래된 대답’이란다. 거기에서 그는 돈키호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반가웠다.
게스트는 돈키호테를 무모한 꿈을 꾸고 불가능한 길로 뛰어든 낭만기사라고 설명한다. 그런 이가 그립다고. 정말 돈키호테는 무모한 꿈을 꾼 광인이기만 할까. 돈키호테의 광기는 종교개혁의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더 가혹하게 인간을 억압했던 시대에 대한 반항인 것은 아닐까. 그 시대는 미친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었던 시대였으니.
돈키호테는 존재하지도 않은 가상의 여인, 둘시네아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라 믿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라고 칼을 겨눈다. 그 광기는 광기라기보다 교회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종교재판장으로 넘겨졌던 시대에 대한 고발은 아니었을까.
정말 세상이 빠르게 돌아간다. 그 세상이 만들어내는 것을 얻겠다고 시류를 타다가도 문득 올라오는 물음이 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내 속도, 내 박자인가, 하는 물음. 고전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떠밀듯 밀려오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내 속도, 내 박자를 고려하여 내 생각대로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겠다. 그것은 얼마 전 ‘우먼센스’에서 소개한 논나맥싱의 정신과도 통한다.
논나맥싱(Nonna Maxxing), 네모난 화면에서 벗어나고 효율이나 이득의 관점에서도 벗어나 할머니처럼 느긋하고 따뜻하고 단순하게 사는 삶이란다. 빵을 굽고, 손수 밥상을 차리고, 천연소재의 편안한 옷을 입고, 화초를 키우고, 뜨개질을 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리듬과 박자를 찾아가는 그런 류의 삶 말이다.
돈키호테가 말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 진실하고도 절박한 말이다. 권력이 규정하는 인간,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인간이 아니라 내가 아는 나, 내가 알아가고자 하는 나, 그것이 고전을 읽고 논나맥싱을 추구하는 삶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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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 journalist@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