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인 우리 축구단은 멘탈코치까지 두게 되었다. 한덕현 멘탈코치, 그가 말한다. 우리 선수들의 심리상태가 안정적(Stable)이라며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될 것이란다. 하던 대로, 안정감에서 오는 것이다. 마음이 안정감을 잃으면 상황판단도 쉽지 않고 집중력도 생기기 않는다.
안정감은 그렇게 드러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도 알고 있다. 마음이 안정감을 잃으면 균형이 깨진다는 사실을. 때로는 깨진 균형을 잡아가기 위해서도 안정감을 찾아가는 자신만의 법을 가지고 있는 것은 큰 자산이다.
지금 사는 집을 처음 보았을 때 집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앞이 훤한 밝은 1층! 화단도 있고 햇빛도 좋고 새들의 노랫소리도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공기가 좋고 조용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봄이 되자 그 화단 빈 곳에 어느 할머니가 상추를 심고, 쑥갓을 심고, 고추를 심었다. 잘 가꾼 텃밭에 할머니가 맨 줄을 따라 피어나는 호박꽃까지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이었다. 창문을 열고 있는데 그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텃밭이 참 정갈하네요.” 나로서는 인사를 건넨 것이었는데 할머니 반응이 놀라웠다. “너, 누구니? 왜 거기에 있어. 그 집은 내가 아들 살라고 사준 건데. 빨리 나와.”
놀랐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되물었다. “아드님이 누군데요?” “우리 아들 OO이!”
“OO 씨, 어디 계세요? OO 씨 하고 얘기하고 싶은데.” “저기 와, OO이!”
물론 아들은 거기 없었다. 두 번을 그렇게 당하고 나니 안 되겠다 싶어 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도 그 할머니를 알고 있었다. 4층에 사는 할머니인데 자기에게도 그랬다는 것이었다. 아들 내외가 3층에 살았는데 이사를 갔단다. 자신에게 그 아들 전화번호가 있으니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보겠단다.
그러고 나서는 정확하게 일주일, 할머니는 나와 마주쳐도 소란을 부리지 않았다. 아마 아들에게 한 소리를 들은 것 같고, 아들의 말에는 반응할 만큼 일상이 가능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일주일 뒤 또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나는 그냥 베란다 문을 닫아버렸다. 불쾌했다. 왜 저런 할머니를 혼자 두는가. 생각해보니 그 물음은 할머니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불쾌한 감정이 일으킨 것이다.
그 할머니의 망상의 원천 혹은 발작버튼은 아들이 살아야 할 집에 다른 사람이 산다는 것이었다. 아들, 기억이 무너져가는 와중에도 꼭 붙들고 있는 그 이름 OO이….
역지사지의 기본은 가만히 지켜보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물음부터 바뀐다. 우리 부모님이 저랬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만일 내가 저렇게 된다면? 물음이 바뀌니 나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었다. 피해자 연대를 만들어 그 할머니의 삶을 통제될 수밖에 없는 곳으로 몰고 싶지 않았다.
새벽 5시부터 하루에도 대여섯 번은 나와 일군 그 할머니의 텃밭은 정갈하다. 상추도, 쑥갓도, 호박도, 토란도 잘 자라고 있다. 그렇게 생명들을 잘 돌볼 수 있다면 그 할머니는 나름 안정적인 것이다. 그래서 정리했다. 피해자로 살지 않기로. 마주치지 않으면 할머니의 발작버튼은 작동되지 않으니 할머니가 보이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방으로 들어가 명상을 하기로 했다. 할머니가 몽학선생이 된 것이다. 안정감을 회복하는 일, 모든 일의 근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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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 journalist@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