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고려인 사업가 '장 회장'과 수감 중인 옛 동업자 '박 안톤'(가명). 이들은 한때 식품사업을 함께한 평범한 동업자로 보였다. 이후 두 사람 관계는 틀어져 법적 소송전을 벌였다. 그런데 두 사람 관계를 되짚어가면 △러시아 마피아 유착 △총기 은닉 △범죄 피의자 밀항 △자금세탁 △현직 경찰관과의 석연치 않은 관계 등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고 믿기 힘든 의혹과 사건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일요신문은 안톤의 진술과 통화 녹취 및 휴대전화 메시지, 금융 관련 자료, 사정당국 작성 문건 등을 토대로 ‘장 회장-박 안톤’ 두 사람 주변에서 2020년부터 벌어진 사건과 의혹 전말을 서울과 부산, 김해 등지에서 9개월 동안 추적했다.
[연재 순서][일요신문] 러시아 극동 수산업계의 거물 올레크 칸(Олег Кан). 러시아 언론은 그를 '대게 왕(крабовый король·크랩 킹)'이라 부른다. 하지만 화려한 성공 신화만 존재하진 않는다. 살인교사, 조직범죄, 대규모 게 밀수와 탈세, 해외 도피, 천문학적 규모의 자산 환수까지. 그의 이름을 둘러싼 형사·경제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마피아의 심부름꾼 ①] 총기와 밀항, 그리고 돈세탁
[마피아의 심부름꾼 ②] 2020년 고려인 난투극, 사라진 한 사람
[마피아의 심부름꾼 ③] "술 상자에 돈 넣어 경찰에 바쳤다"
[마피아의 심부름꾼 ④] 난투극 도망자 밀항, 경찰관은 알고 있었다…녹취 속 그날 대화
[마피아의 심부름꾼 ⑤] 은행서 막힌 수십만 달러, 주인은 누구?
[마피아의 심부름꾼 ⑥] 고려인 성공신화 장 회장, 은둔하는 까닭
[마피아의 심부름꾼 ⑦] 대게 수입 독점 '대게왕' 검은돈 어디로…
[마피아의 심부름꾼 ⑧] 세계가 추적한 '대게왕' 한국만 몰랐다
그의 악명은 러시아 국경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본과 미국, 영국, 독일, 벨기에, 폴란드 등 세계 각국 언론은 수년에 걸쳐 칸의 사업과 범죄 혐의, 재판 과정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이들 외신 보도에는 '한국'이라는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러시아와 세계 언론은 칸을 어떤 인물로 그려왔을까. 그리고 그의 국제적 사업망과 연결된 한국 언론은 정작 칸을 어떻게 다뤘을까.

러시아에서 칸은 단순한 수산업자에 그치지 않는다. 일본 잡지 '쿠리에 자퐁(クーリエ・ジャポン)'이 2016년 보도한 올레크 칸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보이지 않는 게왕'에 가까웠다. 매체는 "사할린에서는 '극동의 게는 모두 올레크 칸의 것'이라는 말까지 돌았다"고 소개했다.
당시 칸과 사업 파트너들이 오호츠크해 게 어획 쿼터의 상당 부분을 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작 칸 자신은 공식 석상이나 언론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칸은 지역 스포츠 시설과 아동·한부모 가정 지원 등에 거액을 기부하고, 어려움에 빠진 수산업체를 인수하는 등 '지역 유지이자 후원자'의 얼굴도 갖고 있었다. 수산업계를 뒤에서 움직이는 거물이면서, 지역사회에선 자선사업가로 알려진 이중적 모습이었다. 실제 그는 2020년 3월 한국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도 코로나19 지원 성금 1억 2025만 원을 기부했다.
러시아 독립매체 '메두자(Медуза)'는 칸의 사업망이 러시아 정·재계 유명 인사들과 얽히는 장면들을 파고들었다. 2020년 러시아 유명 방송인이자 대선후보 출신인 크세니야 솝차크는 칸과 연관된 게잡이 회사 KUK와 모네론의 지분을 사들이려 했다. 매체에 따르면 투자하려던 금액은 수백만 달러 규모였다.
하지만 러시아 수사당국이 두 회사의 실질 지배자를 칸으로 의심해 자산을 동결하면서 거래가 막혔다. 이후 솝차크의 어머니인 류드밀라 나루소바 상원의원까지 나서 대법원장에게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대게 왕'의 사업체를 둘러싼 갈등이 수산업계를 넘어 러시아 정치·미디어 엘리트까지 번진 셈이다.
칸이 러시아를 떠난 뒤에도 각종 사건이 잇따랐다. '칸 사망설'이 대표적이다. 그의 변호인단은 칸이 2023년 2월 영국 런던에서 췌장암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 검찰은 사망 사실을 입증할 만한 객관적 자료가 부족하다며 이를 의심했다.
그러던 중 2026년 3월 3일 러시아 '코메르산트(Коммерсантъ)'는 칸의 아들 알렉산드르 칸의 재판을 보도했다. 알렉산드르가 아버지와 연결된 수산회사 경영과 해외 게 판매에 관여하면서 실제보다 낮은 가격이 적힌 무역계약을 해온 혐의 재판이었다. 그러나 올레크 칸에 이어 아들 역시 러시아 밖에 머무는 상태에서 궐석재판으로 진행됐다.

국가와 매체는 제각각이지만, 보도 속 올레크 칸의 모습은 대체로 일관됐다. 거대한 게 산업을 장악한 '대게 왕'. 그 이면에는 살인교사·밀수·조직범죄·탈세·해외 도피 등 각종 의혹과 형사사건이 얽혀 있다. 일요신문은 칸의 실체를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확보한 관련 보도를 데이터로 분석했다.
확보한 러시아 현지 보도는 146건이다. 러시아 외에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벨기에, 라트비아, 말레이시아, 폴란드, 루마니아, 스페인, 체코, 캐나다, 인도 등 13개국 35건의 보도도 분석했다. 동일 통신사 기사를 여러 매체가 전재했거나 사실상 같은 내용을 반복 보도한 사례를 묶으면, 해외 보도는 총 25건의 보도 흐름으로 정리된다.
러시아 기사 146건을 사건 유형별로 분류한 결과, 재판 등 사법 절차 관련 보도가 33건(22.6%)으로 가장 많았다. 자산 국유화·환수가 27건(18.5%)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이어 사망·사망설 13건(8.9%), 가족·특수관계인 12건(8.2%), 조직범죄·밀수 12건(8.2%), 수산업 비즈니스 11건(7.5%), 살인사건 8건(5.5%), 기업 채무·파산 7건(4.8%) 순이었다.
형사재판과 자산 국유화·환수 관련 보도가 전체의 40%를 넘는다. 칸을 단순 수산업자라기보다는 형사책임과 재산 환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대다수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살인사건과 조직범죄·밀수 관련 보도는 칸의 사업망을 둘러싼 의혹이 단순한 경제범죄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다. 가족·특수관계인 관련 보도 역시 수사가 칸 개인을 넘어 주변 인물과 기업으로 이미 확대됐다는 의미다.
기사 제목에 사용된 표현도 눈길을 끈다. 러시아 기사 146건 중 69건(47.3%)이 제목에 '대게 왕'이라는 별칭을 사용했다. 유죄 판결이나 형량 선고 관련 표현도 26건(17.8%)에 달했다. 이어 밀수 11건(7.5%), 살인·살인미수 등 직접적인 살인 관련 표현도 8건(5.5%) 확인됐다.

보도 내용별로는 게 산업 관련 내용이 12건(48%)으로 가장 많았다. 밀수 의혹 9건(36%), 사망설 8건(32%), 자산 압류 7건(28%), 살인교사 혐의 6건(24%), 해외 도피 5건(20%), 국유화 4건(16%), 탈세 3건(12%) 순이었다.
해외 보도에서도 칸의 수산업과 밀수 의혹이 핵심 주제로 다뤄졌다. 특히 밀수와 해외 도피, 살인교사 혐의 등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관심의 범위가 러시아 내부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칸을 둘러싼 사건은 국경을 넘는 수산물 유통망과 기업 관계, 해외 체류 문제까지 얽혀 있다. 세계 언론은 그를 단순한 수산업자가 아니라 국제적 범죄 의혹과 사법 절차의 중심에 선 인물로 다뤄왔다.

주목할 대목은 세계 각국의 보도에서 '한국'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해외 25건 보도 흐름 가운데 최소 8건에서 한국이 직접 거론됐다. 한국이 거론된 보도는 2016년부터 2025년까지 10년간 계속됐다. 2016년 1건, 2019년 2건, 2023년 1건, 2024년 2건, 2025년 2건 등이었다. 특정 사건에서 우연히 한 번 등장한 수준이 아니었다.
가장 빈번한 내용은 한국이 게 밀수·불법 수출의 주요 통로로 지목된 사례(4건)였다. 칸의 한국 거주·이주 정황(2건)과 한국 거주허가 보유 여부(2건)도 다뤄졌다. 이 밖에도 한국에서 치러졌다는 장례식 논란, 한국계라는 혈통적 배경, 한국 법인 올베스(OLVES), 기업 지배구조 분쟁, 항만의 불법 수산물 통제 체계 등 다양한 맥락에서 한국이 등장했다.
실제 러시아 통신사 '인테르팍스'는 칸의 살인교사 재판을 보도하며 그가 한국 거주허가를 보유하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 검찰은 칸 일가가 해외로 게를 밀수·판매해 챙긴 범죄 수익금을 외국 은행 계좌에 은닉했다고도 특정했다. 미국 매체 '씨푸드소스'가 인용한 러시아 방송의 불법 어획 의혹 보도에서도 한국은 일본과 함께 주요 밀수출 기착지로 지목됐다.

러시아 극동 수산업과 불법 어획 문제를 오랫동안 추적해온 러시아 '리바크 캄차트키(Рыбак Камчатки)'의 키릴 마레닌 기자는 칸의 세력이 지닌 한국의 역할에 주목했다. 마레닌 기자는 러시아 극동의 불법조업과 이른바 '게 마피아'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이트 '스톱크랩마피아(StopCrabMafia)'를 직접 운영해온 탐사기자이기도 하다.
그는 일요신문에 "한국은 일부 러시아 수산·게 사업자들에게 단순한 판매시장이 아니라 '수출 허브' 역할을 해왔다"며 약 20년 전 작성된 현지 수산자원 감독기관 '캄차카 특별해양감독국(Камчатская спецморинспекция)'의 한 내부 보고서를 소개해줬다. 해당 보고서에는 이 같은 내용이 담겼다.
"한국의 부산은 최근 몇 년 사이 러시아 수산업의 가장 중요한 거점 중 하나가 됐다. 해외 구매자들에게 러시아산 수산물을 공급할 때 'FOB 부산' '부산 창고 인도' '부산 냉동창고 인도' 등의 가격 조건을 제시하는 사례가 갈수록 늘고 있다. (중략) 한국 세관은 자국으로 반입되는 러시아산 수산물의 약 80%(55만 톤 이상)를 통계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 수산물은 선박에서 보세 냉동창고로 옮겨진 뒤, 서류를 새로 작성하는 과정을 거쳐 일본과 미국 등으로 수출된다."마레닌 기자는 "칸이 연루된 사건에서도 비슷한 사실들이 언급됐다"며 "칸의 기업들이 게 수출가격을 실제보다 낮게 신고하고, 자신들이 지배하는 해외 기업을 거래 중간에 두는 방식이 사용됐다는 것이 러시아 수사당국의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주현웅·김지영·남경식·최희주 기자 기자 chescol2@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