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전 대통령의 처남 이창석 씨가 8월 19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에서 구치소로 향하는 차에 올라타는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검찰은 지난달 처남 이창석 씨를 구속한 데 이어 차남 재용 씨를 3일 소환조사하며 전 전 대통령의 턱 밑까지 칼 끝을 들이댄 상태다. 검찰의 압박이 강해지자 전 전 대통령 측에서도 기류 변화가 감지된다. 미납추징금 1672억여 원을 자진납부하겠다는 의사를 검찰에 밝힌 것이다.
전 전 대통령 측이 자진납부 의사를 밝힘에 따라 검찰 수사도 속도조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실제로 지난 3일 차남 재용 씨가 검찰에 출석할 당시 상황은 일반적인 검찰 수사 때와 차이점이 많았다. 우선 검찰은 차남 재용 씨에게 먼저 소환통보를 한 것이 아니라 재용씨 측에서 검찰에 출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 재용 씨는 이번 수사의 주요 피의자이고 구속 등 사법처리가 예상되는 신분이지만 변호인 없이 홀로 검찰 수사에 임했다.
검찰은 재용 씨가 출석 의사를 전해오자 ‘보안’을 이유로 오전 7시 30분에 세간의 눈을 피해 출석하도록 배려했다. 보통 주요 수사 대상자가 오전 10시께 출석하면서 언론 등에 노출됐던 것과 비교하면 검찰의 이 같은 대응은 ‘과잉친절’로 보인다. ‘검찰이 추징금 자진납부를 유도하기 위해 지나치게 배려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추징금 자진납부 등 여러 가지 변수가 있고 전 전 대통령 측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에 보안을 유지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수사를 통해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추징금을 완납받게 되면 국가적으로 더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검찰은 공식적으로는 추징금 납부 여부와는 상관없이 수사를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공식입장과는 반대로 “재용 씨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여부 등에 대한 논의는 내부적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당분간 할 계획도 없다”며 “사법처리 수위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을 내놓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의 처남 이창석 씨가 지난 13일 15시간 가까운 고강도 조사를 마치고 돌아간 지 이틀도 되지 않아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과 대조적이다.
전 전 대통령 비자금 은닉·세탁에 단순 가담한 이 씨에 대한 신병처리는 속전속결로 진행하면서 주범격인 차남 재용씨 등 일가에 대한 부분은 주저하는 외형을 보이고 있다. 결국 검찰이 전 전 대통령 일가를 수사해 사법처리하면서 정치적 부담을 떠안기보다는 미납추징금 완납을 이끌어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 전 대통령 측은 내부 논의를 거쳐 ‘미납 추징금 납부 계획안’을 검찰에 제출할 예정이다. 일가의 부담 금액에 대해 조금씩 입장 차이를 보이면서 확정된 상황은 아니지만 장남 재국 씨가 700억 원, 재용 씨는 500억 원, 삼남 재만 씨는 200억 원, 장녀 효선 씨는 40억 원 상당을 부담할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이미 압류한 800억 원 규모의 재산 부분을 비율에 따라 차감할 경우 실제 납부금은 이보다 줄어들 수 있다.
검찰은 전 전 대통령 측이 납부 계획안을 제출하면 이를 검토해 자진납부 의사와 관련한 신빙성을 확인한 뒤 수사 계획을 조정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또 차남 재용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곧바로 청구하기보다는 장남 재국 씨 등에 대한 소환조사 ‘카드’를 꺼내들고 빠른 자진납부를 압박할 수 있다.
다만 전 전 대통령 일가가 미납추징금 납부를 위한 자금 마련에 실패하거나 내부 의견조율이 어려워져 검찰에 명확한 ‘신호’를 주지 못한다면 검찰로서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이 경우 비자금 단순 관리인인 처남 이창석 씨가 구속된 것과 형평성을 고려하면 차남 재용 씨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가 빨라질 수 있다. 검찰 관계자는 “전 전 대통령 측의 추징금 납부가 늦어지게 될 경우 검찰의 압박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며 “최악의 경우 전 전 대통령 본인이 검찰에 다시 한 번 불려나오는 수모를 겪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전 전 대통령의 자진납부 움직임과 더불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지난 4일 추징금을 16년 만에 모두 납부하면서 추징금 장기 체납자들에 대한 압박도 강해지고 있다. 검찰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김종은 전 신아원 회장 등에 대한 수사 필요성에 대해 내부 검토 작업을 벌이고 있다. 채동욱 검찰총장은 취임과 동시에 고액 벌과금·추징금 체납자들의 은닉 재산을 밝혀내고 환수하기 위한 전담팀을 꾸렸다.
대기업 총수 중에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2조 9460억 원,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의 자금을 관리한 김종은 전 신아원 회장이 1962억 원 등 추징금을 미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전체 추징금 25조 4100억 원 중 25조 3800억 원이 미납된 상태”라며 “고액 추징금 미납자들이 ‘버티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추징금 납부를 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법무부는 최근 미납추징금 환수를 위해 형사소송법 개정안 등을 마련한 상태다.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시행되면 검찰은 추징금 수사를 위해 △계좌추적 △압수수색 △과세정보 조회 △관계인 출석 요구 △진술 청취 △서류 또는 물건 소유자·소지자·보관자에 대한 제출 요구 등을 할 수 있다.
이승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