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실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과 달리 태국 정부와 국회를 향한 민심은 갈대와 같아서 집권당은 포퓰리즘 정책을 자주 내놓는 편이다. 최근 태국 정부는 16~20세 청소년 1명에게 1만 바트(약 43만 원)를 지원하는 현금 지급 정책을 내놨다. 이미 앞서 2024년 9월엔 1차로 취약계층, 2025년 1월엔 2차로 만 60세 이상 고령자에게 현금이 지급됐다.
16~20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이번 지원은 3차인 셈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탕 라트’라는 앱을 통해 디지털 화폐를 지급한다는 것이다. 태국 정부는 이를 ‘디지털 월렛’이라고 부른다.
현금성 지원은 한국에서도 논쟁적인 정책 중 하나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총선 당시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소득 수준에 따라 25만~35만 원의 지역사랑상품권을 지급하는 민생회복지원금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정부는 총 13조~18조 원에 달하는 재정 지출 규모에 비해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가 크지 않다며 부정적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현금 지급 정책은 경제 부양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일요신문은 해답을 찾기 위해 태국개발연구원(TDRI)을 방문했다. TDRI는 태국 정부로부터 독립된 비영리 민간 싱크탱크다. 주 연구 분야는 경제와 사회 정책 분야로 우리나라의 한국개발연구원(KDI)과도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1인당 43만 원 주려면 19조 원 필요한데…

디지털 월렛 정책 집행에 필요한 예산은 총 4500억 바트(약 19조 3000억 원)이다. 태국의 2025 회계연도 예산이 3조 7530억 바트(약 141조 5300억 원)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정부 예산의 12%나 이 정책에 쓰이는 셈이다.
가장 큰 문제는 막대한 규모의 예산을 어디서, 어떻게 마련하느냐는 것이다. 노나릿 박사는 정부가 예산 마련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을 썼을 것이라 봤다. 첫 번째는 기존 예산을 재조정하는 것이다. 노나릿 박사는 이를 “다른 사업을 밀어내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렇게 밀려나는 사업 대부분이 장기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 예컨대 R&D(연구개발)의 경우 지속적인 예산 투입이 필요한데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잘려 나가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두 번째 방법은 공공부채를 늘리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만 해도 태국의 공공부채 비율은 GDP(국내총생산)의 45% 수준이었다. 중소득 국가 기준으로 보면 꽤 좋은 수치였다. IMF(국제통화기금)도 그렇게 평가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공공부채 비율은 GDP의 60%까지 뛰었다.
노나릿 박사는 "디지털 월렛 같은 현금성 지원을 계속하면 공공부채 비율이 GDP의 70%까지 오를 거라는 전망도 있다"며 "정부도 당장 막대한 예산을 한꺼번에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지원 대상을 나눠 단계별로 지급하고 있다고 본다"고 했다.
#“돈 쏟아부어도 실제 효과는 거의 없어”
반면 태국 정부는 이러한 단계적 지원이 경기 침체 속에서 즉각적인 구제책을 제공하고 빈부 격차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3차 지원의 경우 모바일 앱을 통해 지역 내에서 사용가능한 디지털 화폐 형태로 지급되기 때문에 내수 진작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1인당 1만 바트 디지털 화폐 지급은 현 집권당인 프아타이당의 핵심 공약이었다. 패통탄 친나왓 총리는 현금 지급 정책이 국민들로 하여금 소비를 촉진해 내수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상하는 GDP 성장률은 1.2~1.6%포인트(p)다. 태국 중앙은행(BOT)을 비롯한 경제학계에서 우려가 쏟아졌지만 태국 정부는 해당 안이 내각을 통과하는 대로 가능한 빨리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지역화폐로 소비를 활성화한다는 구상은 승수효과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다. 승수효과란 정부 지출이 최종적으로는 최초 지출보다 큰 규모의 국민소득 증가로 이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태국 재무부는 이 정책으로 인한 승수효과가 2.6~2.7%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태국 정부의 장밋빛 기대와는 달리 시장과 국제기구들은 냉정한 평가를 내놓고 있다. 세계은행은 태국 GDP 성장률이 1.2~1.6%p가 아닌 단기적으로 0.5~1.0%p로 소폭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태국 내 경제학자들 분석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예측한 것처럼 돈이 순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TDRI의 포용적 개발 부문 연구책임자인 솜차이 짓수촌 박사는 “16~20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3차 지원은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1차 지원보다 경제적 효과가 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정말로 경제를 살리고 싶다면 단기적인 경기 부양책보다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노나릿 박사 역시 “취약계층과 고령층이 우선적으로 지원을 받았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경기부양책의 효과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며 “대부분 사람들은 지원금을 저축하거나 수도요금이나 세금을 내는 등 내수 경제 활성화와는 무관한 곳에 돈을 지출했다”고 지적했다.

노나릿 박사는 “정부 지원금이 개인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사용되거나 장기적인 소득 창출로 이어지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경제 전체로 돌아오는 선순환 효과도 거의 없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에서 살아남을 수 있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의 고율 관세 정책까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영국 워릭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현재 태국의 국립개발행정연구소(NIDA) 개발경제학 부교수로 재직 중인 유타나 세타프라모테 교수는 “만약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따라 미국과 태국의 상호관세율이 37%가 되면 태국 정부의 재정 여력은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은 태국에 36% 상호관세율을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태국 정부는 4월 24일 “미국 관세 정책으로 인한 경제적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최소 5000억 바트(약 21조 3150억 원) 투입이 필요하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유타나 교수는 “관세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재정을 투입하다 보면 디지털 월렛 예산이 부족할 것”이라며 “대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면 현금을 지급하는 형태의 경기부양책은 효과를 내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복지 정책 뒤 숨은 진짜 의도는?

유타나 교수는 16세 청소년들이 2년 뒤 투표권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쯤에서 짚어봐야 할 것은 이렇게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라고 반문하며 “2년 뒤 총선이 있다. 지금 돈을 받은 이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런 식의 현금 지급 정책은 지지율을 얻기 위한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돈이 있다면 계속 주려고 할 것이다. 아마 다음 차례는 근로소득이 있는 자들이 대상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청소년의 디지털 기술 활용을 높이기 위해 지원금을 디지털 화폐로 도입한다’는 정부 논리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유타나 교수는 “이미 많은 이들이 모바일 뱅킹에 능숙하다. 특히 젊은 세대는 휴대폰으로 못하는 것이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태국은행(CIMBT)의 수석 경제학자인 아몬텝 차울라는 “현재 GDP의 70%에 달하는 공공부채 비율이 5~10%p 증가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낸 바 있다. 당장 국가가 추가적인 부채를 내더라도 장기적으론 더 높은 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24년 태국의 경제 성장률은 2.5%였다. 이는 4~7% 성장한 주요 아세안 국가들보다 뒤처진 수치다. 국가경제사회발전위원회(NESDC)는 태국의 올해 경제 성장률이 2.3~3.3%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KDI에 따르면 한국의 2024년 경제 성장률은 2.0%였다.
일요신문이 만난 경제 전문가들은 국가 경제의 장기적인 성장과 안정을 촉진하는 전략적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현재의 경제 상황은 코로나19 팬데믹 때처럼 단기적인 경기 부양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며 “구조 개혁과 지속 가능한 소득을 창출하는 사업을 위한 투자야말로 국가 부채 감축과 경제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태국=최희주 기자 hjoo@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