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동안 대기업 통신사의 영업팀에서 헌신적으로 일한 김낙수 부장은 한직으로 밀려날 것 같은 인사발령이 임박한 순간 이렇게 말한다. 평생 남부럽지 않은 위치에서 일하고 가족을 건사한 김 부장에게 닥친 일생일대의 위기와 ‘짠내’ 나는 분투가 시청자를 사로잡고 있다.

이 드라마는 그저 중년 부장님의 고군분투로만 치부할 수 없다. 대기업 직장 생활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한 설정으로 몰입감을 높이고, 무한 경쟁 사회에서 남과 비교하면서 내달리는 우리네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한 번 보면 멈출 수 없는 이야기로 시청률도 상승세다. 주말 밤 10시 30분에 방송 중인 가운데 10월 25일 첫 회에서 시청률 2.9%(닐슨코리아 전국기준)로 출발해 9일에 방송한 6회는 4.7%까지 올랐다. 본방송 이후 넷플릭스를 통해서도 공개 중인 가운데 ‘오늘 대한민국 톱10 시리즈’에서 줄곧 정상을 지키고 있다. 주말 안방극장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김 부장님이 처한 잔혹한 현실 ‘짠내’ 풀풀
류승룡은 ‘김 부장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다. 1000만 흥행 영화인 ‘극한직업’과 ‘7번방의 선물’부터 판타지 히어로물 ‘무빙’과 최근 주연한 ‘파인’까지 다양한 장르를 오가면 웃음기 많고 미워할 수 없는 현실 캐릭터로 대중을 사로잡은 그의 진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빛이 난다.
류승룡이 그리는 김낙수 부장은 주변 어딘가에서 본 듯한 인물이다. 서울 아파트 자가에 대기업 부장의 지위, 아들까지 잘 키운 자부심으로 살지만 현실은 부서에서도 가정에서도 입지가 위태롭다. 그의 팀원들은 보고서의 폰트 크기와 색깔까지 일일이 수정하고, 탕비실 커피를 두고 카페에 간다는 이유로 타박을 하는 김 부장을 ‘꼰대’로 여긴다. 아내와 아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가치관만 강요하는 김낙수는 아내, 아들과 소통의 단절을 겪는다. 많은 것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노후를 생각하면 까마득하고 대출금 상황부터 아들 등록금 걱정이 앞서는 처지이기도 하다.

연출을 맡은 조현탁 감독은 “원작 팬들은 느끼겠지만 류승룡이 김 부장을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드라마의 엄청난 차별화 포인트”라며 “연출하는 내내 김 부장이 류승룡을 연기하는지, 류승룡이 김 부장을 연기하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하는 모습을 봤다”고 놀라워했다. 조 감독은 염정아 주연의 ‘스카이캐슬’부터 천우희가 주연한 ‘히어로가 아닙니다만’까지 완성도 높은 드라마로 고유한 세계를 구축한 중견 연출자다. 그런 감독마저도 류승룡의 활약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
류승룡은 이번 드라마에 출연을 결정한 이유에 대해 ‘현실적’이라는 점을 가장 먼저 꼽았다. 류승룡은 “그동안 소화한 그 어떤 역할보다 현실적이다. 배우로서 과거나 미래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가상의 이야기를 전해드릴 때가 많은데 ‘김 부장 이야기’는 지금을 얘기하는 작품”이라며 “지금 세대와 세태에 대해 말하면서 그 안에 섭섭함, 미안함, 뻘쭘함, 고마움, 절실함 등 다양한 감정이 들어 있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여러 감정을 기막히게 발췌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연출하는 감독님에 대한 믿음도 류승룡의 실감 나는 연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류승룡의 ‘꼰대’ 애잔하다
12부작 ‘김 부장 이야기’ 전반부가 임원이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김낙수 부장의 분투를 그렸다면, 후반부에는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새로운 여정에 주목한다. 대기업 인사팀은 구조조정을 이유로 지방 공장으로 밀어낸 김 부장에게 공장 인원 감축안을 요구하고, 회사 입맛대로 실행한다면 본사로 다시 발령을 내주겠다고 제안한다. 열심히 일하는 공장 직원들을 자신의 손으로 ‘자르는’ 상황에 놓인 김 부장은 고민에 빠진다. 대기업 사원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25년의 시간을 돌아보는 계기다.
그 와중에도 놓칠 수 없는 핵심은 ‘밉상’인 김 부장의 ‘꼰대’ 스타일이다. 서울 본사 근무 당시 부하 직원들이 새로운 부장에 충성하는 것을 알고 은근히 비꼬기도 하고, 공장의 현장 직원들을 무시하면서 ‘본사 출신’인 점을 강조하는 모습까지 꼰대 그 자체다. 하지만 이 또한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오히려 애잔하다.

등장인물들에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점도 ‘김 부장 이야기’의 힘이다. 김 부장뿐 아니라, 그의 사수였지만 지금은 살길 찾는 백 상무(유승목 분), 상사 비위 맞추는 능청스러운 30대 영업맨 정 대리(정순원 분), 남편 퇴직에 대비해 공인중개사 시험에 몰두하는 낙수의 아내 하진까지 캐릭터들의 처지가 ‘내 일’처럼 느껴진다. 기성세대가 정한 길 대신 진짜 원하는 방향을 찾아가는 낙수의 아들이자 20대 청춘인 수겸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조현탁 감독은 “드라마가 50대 중년의 이야기이지만 세대 간의 단절을 메우는 작품일 수 있다고도 판단했다”며 “실컷 웃다가 한순간 울컥할 수도 있는 이야기로 그리려고 했다”고 밝혔다.
이호연 대중문화평론가


